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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 남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에게 나의 행동이 어떻게 보이는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시대를 완전히 초월한 선각자이거나 뻔뻔스러운 철면피일 것이다. 어떤 미국 시인은 “양심이란 마음속에서 ‘누가 보고 있다’고 주의를 주는 목소리”라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는데, 물론 이것은 남이 보지 않으면 비양심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속악한 대중을 비꼬는 말이다.
‘양심’이란 물론 누가 보든 안 보든 따라야 하는 자신의 내적인 도덕률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남의 시선을 의식할 때 더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독소가 될 수 있다. 정체적인 농경사회에서는 누구나 남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예전의 우리나라에서 백성은 유교의 계율과 농경사회의 조건이 겹쳐서 전통과 인습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다. 특히 ‘체면’을 지켜야 했던 양반 계급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남의 이목’을 의식해야 했고,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 했고, 따라서 자신의 개성이나 적성은 사장(死藏)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늘날의 안목으로 보면 물론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 때는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으면 양반의 생명인 명예와 평판이 훼손돼 같은 양반사회에서 소외당하게 되고 벼슬길과 자녀의 혼인길이 막혔기 때문에 불가피했다.
이렇게 획일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는 구성원을 통제하기 쉬워서 내적인 도전에 의해 무너질 위험이 적은 반면 구성원들의 창의력이 말살되고 불만이 누적돼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견디기 힘들다. 조선조 사회의 인습의 억압은 너무도 극심해서 양반 가문의 자녀가 음악가나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양반가문의 딸이 ‘신내림’을 받으면 그 집에서는 딸을 일생 밀실에 가두어 두거나 몰래 죽여 버렸다.
서양 사회는 예전에도 그렇게까지 획일적인 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회가 장기간 안정되면 인습의 지배가 있게 마련이다. 영어에는 전적으로 남의 이목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하는 ‘Grundyism’이라는 어휘가 있다. 어느 문학작품의 등장 인물이 늘 이웃인 그런디 부인 (Mrs. Grundy)이 어떻게 보겠느냐고 걱정을 하는 데서 생긴 단어인데, 서양사회도 인습의 억압이 막강했음을 증명하는 단어다.
서양사회도 상류사회는 지역마다 ‘사교계’가 형성돼 이 사교계를 중심으로 인간관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소외당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절실했다. 그러나 신사 계급은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아마추어로서 자기의 소질을 개발하고 발휘하는 것은 다방면에서 가능했고, 그것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동양사회에 비하면 개성과 자질의 개발이 훨씬 쉬웠고, 따라서 사회가 역동적이고 발전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현대사회는 다행히 구성원들의 다양한 자질의 개발을 통해서 발전하는 사회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는 부와 명예를 획득하고 부모에 보답하고 생의 보람을 얻는 길이 벼슬길 한 가지가 아니고 다양한 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자아를 실현하고 부귀도 얻을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는 사회가 급격히 탈바꿈 하기 위해 인습에 역행하고 반항하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가 되기도 했다.
어느 시대, 사회에서나 인습에 도전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남의 이목에 거슬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 곧 용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남의 이목’은 부당한 간섭과 제재로 작용할 수 있기도 하지만 또한 객관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나의 적성을 개발하고 개성을 보호하면서 또 타인과의 적절한 융화도 이루는 것, 그것이 인생에서의 성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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