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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과도히 시험하지 말라
서지문   |  2005-10-14 13:12:45  |  조회 2202 인쇄하기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 자매들의 노래는 ‘좀 가만히 편히’ 계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주셨을 우리 어머니이지만 그 청만은 들어주시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장이 숙성할 리가 없는데도 메주를 사서 장을 담그시기도 하고, 새알심을 수 백개 만들어서 몇 날 며칠을 두고 먹어도 못 먹을 만큼 많은 팥죽을 끓이시기도 하고 대형 밥솥 하나 가득 약식을 만드시는 등 끊임없이 체력에 무리가 가는 일을 하시고, 며칠씩 앓으시는 일이 잦았다.

평소에는 ‘병아리 같은’ 딸들이 돈 버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쓰럽다면서 불평이 있어도 참고 지내시다가 몸이 아프실 때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리시니까 누가 아픈 것을 곁에서 보지 못하는 나는 두 배로 속이 상했다. 그때는 왜 일생 열심히 사셨으니 노후에 좀 편히 지내시지 않는가, 이해할 수도 없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남보다 몇 배 부지런한 성품에다가 지적인 욕구와 성취욕이 남다른 우리 어머니가 나이 드신들 어찌 ‘편히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는가. 자꾸 편히 계시라고 하지 말고 80대에도 꾸준히 하실 수 있는 일을 마련해 드렸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었고 우리나라에 고령자를 위한 그런 제도적 뒷받침은 전무하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점점 더 나도 우리 어머니와 꼭 같이 늘 조금씩 무리를 하며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체 체력이 변변치 못해서이기는 하지만 조금 무리라고 느끼면서도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설마 이 정도는 하나님이 봐주시겠지’(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하면서 그냥 밀고 나간다.

싱그러운 5월에 바보스럽게 감기에 걸린 것이 너무 속상해서, 온몸의 근육이 다 삭아 버린 듯 아프고 시리고 저린 중에도 계속 책을 읽은 것이 감기를 더 악화시킨 모양이다. 감기를 일년에 한두 번은 잠 좀 충분히 자고 쌓인 피로를 털어 내라는 명령으로 다소곳이 받아들이고 푹 쉬었으면 하루 이틀 아프고 일어설 수도 있었을 텐데. 눈이 화끈거리고 얼굴은 불에 익은 듯하고 뇌 속에서 혈관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위기감에 신음하면서 아플 때만이라도 몸을 상관으로 모시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운명을 시험하며 산다. ‘편히 가만히’ 있는 것은 생명체의 법칙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래 ‘편히 가만히’ 있으면 과로로 병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력감과 역할 상실의 스트레스로 오히려 생명은 단축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리를 하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 그러나 신이 우리의 의식과 의지에 육신이라는 추를 매달아 놓은 것은 인간이 무한히 욕망을 추구하거나 의욕을 발휘하지 말고 절제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운명(또는 신)에 도전해서 운명(이나 신)으로 하여금 ‘본때를 보여 주고 싶게’ 만드는 행위를 ‘tempting fate’(운명을 시험한다)라고 한다. 사람들이 계속 운명을 시험하며 살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아직 농경 사회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영웅’이나 ‘개척자’ ‘선구자’가 못 되는 사람이라도 늘 자기의 한계를 조금씩 초월하려는 부단한 시도를 한다. 그래서 가끔은 운명에게 호되게 매를 맞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서 인간의 능력은 신장되고 세상은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을 지나치게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체력적으로 무리를 하면 자기가 아프고 말지만 ‘내가 힘들여 거머쥔 권력으로 국사를 이 정도는 재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저 인간을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말겠다’ ‘약육강식이 생존의 법칙인데 왜 나만 의리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따위의 어리석음은 ‘tempting fate’를 넘어서 ‘courting disaster’(재앙을 자초하는 일)가 된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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