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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사진 기사였다. 인물이 찍힌 필름(유리 판)이 나오면 가늘고 길게 깎은 연필심으로 원판을 수정하여 손수 인화나 확대를 하는 진짜 사진 기사였다.
아버지의 수정기술은 눈감고 찍은 인물사진의 눈을 뜨게 할 정도라, 만주국 황실의 사진 기사로 특급대우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나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 아니면 이 년에 한 번꼴로 시골집에 다녀가시곤 하였다. 그때마다 조선 땅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고급 랜드셀(등에 메는 가방), 학용품, 레인코트 등을 선물로 주셨다. 어색한 가운데서도 부자의 정을 회복할 무렵이면 다시 훌쩍 떠나곤 하여서 곧 남남이 되듯 아버지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였다.
광복이 되던 1945년 가을, 아버지는 만주 땅에서 돌아오셨지만 곧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의 선전부장, 총무부장을 거치면서 부단장, 단장의 일을 보시게 된 것은 남다른 문장력과 발군의 필력 때문이었다. 대단한 명필이어서 새로 짓는 건물의 상량문이나, 여러 사회단체에서 주관하는 체육대회 혹은 예술제 등에서 시상하는 각종의 상장을 도맡아 쓰시곤 하였다. 그런 날이면 나는 먹을 가는 일, 상장의 용지를 살펴서 드리는 일 등을 도왔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상의 종류에 따라 행서 혹은 예서 등으로 자체를 바꾸어가면서 쓰시는 것이 너무도 신기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행실에 수반되는 훈도에 대해서만은 대단히 엄격하였다. 나는 공부보다 극장에 드나드는 일에 더 열중했던 탓으로 늘 아버지의 엄한 훈도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의 훈도는 자질구레한 잔소리가 아니라, 몇 가지의 잘못을 모아서 호되게 다스리는 큰 꾸중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쥐구멍을 찾기가 바빴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쉰세 살이 되시던 해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장장 18년 동안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시는 엄청난 고난을 겪으셨다. 간혹 내가 일본으로 취재를 가게 되면 병석에서 누우신 채로 일본어의 바른 사용법을 일깨워 주시면서 “일본인에게는 다테마에(거짓 치레)와 혼네(본심)가 있음을 명심하라!” 등 따끔한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다.
어느 해던가 시나리오 작가들이 거리에 나와서 수해의연금을 모금하고 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시고, 원고를 쓰고 있는 나를 불러 사회의 공공이익에 봉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참인간의 도리임을 꾸중으로 타이르시고는 당장 나가서 동료들과 합류하라고 엄명을 내리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18년 병상을 두고 사람들은 ‘장병에 효자 없다’는 말로 날 위로하지만, 효자라는 어휘를 입에 담기조차도 민망할 만큼 나는 아버지를 위해 해드린 것이 없다. 늘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옛 일을 되새기지만, 어느새 나도 돌아가실 때의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겨 버린 노인이 되고 말았다.<끝>
신봉승은... 신봉승씨는 80년대 ‘조선왕조 500년’, ‘동토의 왕국’, ‘풍운’ 등을 쓴 한국의 대표적 사극작가. 70년대에도 ‘별당아씨’, ‘타국’, ‘사모곡’ 등의 화제작을 집필했으며, 그 전에는 ‘갯마을’,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의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으며, 현재 추계예대 영상문예대학원 대우교수, 예술원 연극·영화·무용분과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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