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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규범,전도된 가치
유재천   |  2005-10-14 13:24:07  |  조회 2260 인쇄하기
얼마 전 일이다. 친구들과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던 참이었다. 식당을 나서자마자 한 멀쩡한 중년 사내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돈을 달라고 했다. “당신들만 저녁을 먹으면 되느냐,나도 먹어야 하지 않느냐”며 윽박질렀다. 기가 막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돈을 건네 주었다. 1000원쯤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사내는 “5000원은 주어야지 겨우 이게 뭐냐”며 큰 소리로 대드는 것이 아닌가. 덜컹 겁이 나기도 했다. 그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한 가지 얘기만 더 해보자. 직장이 춘천에 있어 경춘선 열차를 자주 탄다. 봄,가을 행락철이면 경춘선은 언제나 만원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강촌에서 7∼8명의 중년 부인들과 그들의 자녀로 보이는 10여명의 아이가 기차를 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한껏 떠들어대며 의자 위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계속 그렇게 놀았다. 그러나 에미들은 그러는 아이들을 나몰라라 버려둔 채 자기들끼리 떠드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참다 못해 부인네들에게 아이들이 조용히 하도록 타일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부탁하자마자 한 부인이 일어나 그 애들이 무얼 떠들었냐고 오히려 항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기차표를 내보이면서 “나도 돈 내고 탔어요”라고 했다. 내 돈 내고 기차를 탔으니 내 맘대로 하는 데 웬 간섭이냐는 항의였다. 마침 지나가던 승무원이 기차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떠들면 안된다고 아이들을 타이르자 부인들이 떼지어 승무원에게 왜 아이들 기를 죽이냐며 대드는 꼴을 보면서 차라리 ‘귀마개’를 준비하지 않은 내 불찰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은 일상 속에서 너무도 자주 체험하는 까닭에 이제는 우리 모두가 면역이 되어서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공권력마저 그와 같아 버스 정류장이나 인도에 버젓이 주차해놓아도 그만인 사회가 되었다. 법과 상관없이 사는 지상천국이 되었다.

며칠 전 밀양에서 있었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규범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연히, 너무나 당연히 자식들을 잘못 훈육한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 여학생들과 사회에 백배 사죄해야 마땅할 가해자 부모 몇몇이 오히려 피해를 신고한 것이 잘못인 양 피해자들을 보고 “이렇게 (신고)하고 제대로 사나 보자, 몸조심 하라”고 협박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 사회의 규범과 가치가 붕괴되고 전도되었는지를 웅변해준다. 사건을 조사하던 김 모 경장이 피해 여학생들에게 “내가 밀양이 고향인데 (너희들이)밀양 물 다 흐려 놨다”는 등의 폭언을 했다는 보도는 차라리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냉엄한 우리의 현실임을 어찌할 것인가.

이런 일들은 우리 사회의 붕괴된 규범과 전도된 가치를 드러내는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모두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경제는 노력만 하면 몇 년 안에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이에 반해 한번 붕괴되고 전도된 규범체계는 그렇게 쉽사리 건전한 상태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함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규범과 가치가 무규범상태에 이르고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는 현상이 확산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예비될 수 없다. 물론 그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어야만 하고, 제도교육이 입시 위주에서 사람 만들기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매스컴이 건전해야 한다는 등. 그러나 생각할수록 어느 처방이 약효가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우리의 규범체계는 그만큼 중환자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소를 다스릴 처방만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대가 끝나기만 기다릴 수도 없다. 규범체계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기 때문이다. 지금 같아서는 가정교육에도, 제도교육에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기대해본다. 교회(종교)가 규범교육의 보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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