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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정진홍   |  2005-10-14 13:29:25  |  조회 1879 인쇄하기
이제까지 살면서 참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수를 헤일 수가 없습니다. 내 집을 갖겠다고 허리띠를 조아 매면서 이사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사를 하면서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크고 나은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차 세월이 고비를 넘기자 집을 줄이는 이사도 여러 번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사는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짐을 덜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시작한 살림인데 어쩌면 그렇게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왔는지 이삿짐을 내놓다 보면 어처구니없습니다. ‘축복의 흔적’인지 ‘욕심의 흔적’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그저 넘침이 저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 집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살림을 치우고 버리고 없애는 일이 곧 이사를 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릇이나 주방기구들은 집안 젊은 아이들한테 주기도 하고, 쌓인 책은 후배들에게 주기도 하고 헌 책방에 넘겨버리기도 합니다. 옷은 잘 빨고 개어 아파트 단지에 있는 옷 모으는 함에 넣기도 하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가구들은 신고를 하고 처리비를 물고 마당에 내려놓으면 얼마 뒤 없어진 것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웬만큼 치워지고, 그래서 몸무게가 덜어져 가벼워진 그런 기분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문득 아쉬운 정이 때로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들도 없지 않지만 그야말로 ‘털어내는’ 즐거움으로 이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버릴 수도 버리지 않을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물론 접시 하나라도 버리려면 마음 가볍지 않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나를 망설이게 하고 안쓰럽게 하는 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짐은 ‘마침내’ 버려지지 않습니다. 끝내 끌어안고 움직입니다. 그것을 꼭 ‘짐’이라고 해야 하는지, 더 나아가 ‘무거운 짐’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러한 묘사 자체가 부담스럽기조차 한 그러한 살림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진첩입니다.

사진 찍는 일이 무척 귀한 세월부터 시작했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한 살이 사진이 많은지요. 책장을 여러 칸이나 채운 그 앨범들은 왜 또 그리 무거운지요. 자식들이 자라 떠나가 제 살림들을 하고, 평생 같이 있자고 하던 식구마저 훌쩍 떠나고 보니 남은 것은 사진뿐이어서 실은 온갖 살림 다 버려도 이것만은 단단히 지니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사할 때마다 앨범들을 꺼내놓고는 버릴까 버리지 말까 거듭 거듭 고민을 하곤 합니다.

사진을 ‘정지의 미학’이라고 했던가요?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여 순간을 영원이게 하고자 하는 희구가 빚은 문화라는 이야기지요. 참 옳은 설명입니다. 사진이 있어 내 젊음도 거기 있고,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부모님이 거기 계시고, 아직도 옹아리하는 자식들이 거기서 잠을 자고 있고, 팽팽한 친구가 거기 꿈을 꾸며 웃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그 황홀했던 전율도 되살아납니다. 사진이 있어 사진첩을 넘긴다는 것, 기막힌 감격입니다. 이보다 더 ‘신비한 일상’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살림처럼 이 마지막 살림도 서서히 버려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나 아니면 누구도 열어보지 않는 것이 이제 내게 남은 앨범의 운명인데, 나 죽기 전에 한 장 한 장 되살아나는 옛날과 옛 사람들을 이제는 마음속에 담으면서 더 이상 이 사진첩들의 무게 때문에 시달리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더 이사할 필요가 없는 집으로 이사할 때면 가지고 가야할 짐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할 테니까요. 흐려진 기억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에 그 이사를 해야 할 거니까요.

오늘, 가을 아침인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찢어진 결혼사진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서둘러 졌습니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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