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의 직업을 분류하는 기준은 매우 다양합니다. 또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을 거듭해왔습니다. 아득한 때는 수렵과 농경으로 나뉘어 그 역사적 전개가 묘사되기도 했습니다만 점차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우리가 익히 아는 분류체계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분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아예 직업을 둘로 딱 나누어 육체노동을 하는 직업과 정신노동을 하는 직업으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각기 상당한 다른 직업들을 포괄할 것이지만 이 또한 매우 실용적인 분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시적인 분류는 아무래도 직업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직업이 이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많아지고,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새 직업들이 생기면서 육체적인 노동이나 정신적인 노동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중첩된 직종들도 생겨났고, 직업이나 일의 개념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전문직과 비전문직을 구분하면서 앞의 직업은 대체로 정신적인 직종에 속하고 뒤의 직업은 육체적인 직종에 속한다고 하던 ‘상식’이 이제는 잘 통용되지 않습니다. 단순 반복노동이라고 일컫던 비전문적 직종이 실은 그 나름의 대단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수행한다고 일컫던 정신적 직종에서 단순 반복적인 도식적 활동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직업의 분류자체가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고, 직업을 하나하나 들어 잘 설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사전처럼 두툼한 직업 소개서를 보면 그런 사정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이제는 직업이 충분히 분화할 만큼 분화하여 이른바 직업서술의 재편기(再編期)를 지났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거시적인 직업분류가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직업을 크게 둘로 나누어 ‘말하는 일’과 ‘셈하는 일’로 나눈 것이 그 하나의 예입니다.
이 분류를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수렵채취시대는 물론 농경사회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태초’의 이야기입니다. 산업사회도 아닙니다. 그것도 아득한 옛날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정보화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몸의 왜소화’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육체의 퇴장’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몸의 소멸’은 분명합니다.
그야말로 원시적인 물리적 힘의 행사를 업으로 하는 직종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온갖 힘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의 아쉬움을 채워줍니다. 사람이 하기 힘든 세밀한 일조차 이제는 로봇이 대신해준다고 합니다. 그러한 실제적인 ‘경이’를 우리는 예를 들어 전자공학이나 의학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미세한 수술을 해내는 의료장비들을 보면 예술이라는 묘사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을 실감하고, 온갖 기능을 다 갖추고 손바닥 안에서 꿈같은 일을 해대는 전자상품들을 보면 그 놀라움에 기가 막힙니다. 저처럼 늙고 낡은 사람은 실제로 그러한 기구들을 쓰면서도 실감이 나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이와 기적을 낳는 것이 다름 아닌 ‘말하는 일’과 ‘셈하는 일’입니다. 생각을 풀어 여는 개념과 논리들, 세고 헤아리고 모으고 나누어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고 축적하는 계산들, 그런 작업들을 통해 오늘 우리는 몸의 원시적인 힘을 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직업들을 크게 범주화하면서 ‘몸을 통한 일’을 아예 배제해버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이제는 ‘말을 하는 일’에 종사하든지 ‘셈을 하는 일’에 종사하지 못하면 아무데도 끼어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공연한 불안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직업분류나 직업서술이 슬그머니 무서워집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직업이란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낳으며 살고자 하는 사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렇다면 직업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는 일이 ‘인간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일과 만난 사람의 삶도 또한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그 분류의 개념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러잖아도 말만 하고, 셈만 하는 세상인데 이것을 바람직한 직업의 분류개념이라고 들이대면 어쩌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다 알지 않습니까? 분명히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되는데 그 거짓말을 한 사람이 얼마나 깜짝 놀랄 정도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하는지요. 그리고 말은 백번 옳은데 그 말처럼 사는 것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경우들요. 말의 소음 때문에 속상하고 가슴 아프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얼마나 많이 겪으셨습니까? 그런가 하면 셈에 능한 사람들 만나 얼마나 속고, 얼마나 손해를 보았고, 얼마나 분했는지요. 말만으로, 셈만으로 살아 세상살이가 ‘이 지경’인 것을 생각하면 넉넉히 그 직업분류개념을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그 분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말이 말다워지려면 옳은 몸짓으로 그 말이 완성되어야 합니다. 셈이 셈다우려면 그 셈이 옳은 몸짓을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말과 셈은 그것 자체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처음과 끝에 반드시 말과 셈이 담은 내용이 옳은 몸짓으로 구현되어야 비로소 말과 셈은 제 구실을 겨우 하는 것입니다. 호흡과 체온과 든든한 힘으로 몸이 움직여 나와 너와 우리가 서로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직업분류체계에서 ‘몸의 소멸’을 확인한다는 것은 그 분석적 인식내용을 승인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삶의 모습을 확인하는 불안한 조짐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며칠 전, 병원에 갔습니다. 진찰실에 들어갈 때 의사는 검사자료들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숨이 가쁘지는 않죠? 소화도 잘 되고요. 잠은 잘 자고요. 무리하지 말고 긴장을 풀어요.’ 5분 동안 의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 검사서에서 한 번도 눈을 떼고 저를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분의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진찰실을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말하는 일’의 직업과 ‘셈하는 일’의 직업에 더해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의 범주를 그 분류체계 안에 억지로라도 넣고 싶습니다. 적어도 상징적 범주로라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