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아, 선생님. 우리 선생님!
정진홍   |  2005-10-14 13:40:11  |  조회 2231 인쇄하기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우리는 그 선생님을 참 무서워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선생님의 매는 여간 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언지 잘못을 해서 선생님께 뺨을 마진 적이 있습니다. 똑 바로 차려를 하게 하시고 ‘보기 좋게’ 한 대 때리셨는데 저는 뺨이 아픈 것이 아니라 세상이 다 깨지는 줄 알았습니다. 불이 번쩍하면서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뺨을 때리는 일이 그리 좋은 체벌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만 옛날에 흔히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선생님의 매와 다른 선생님의 매를 넉넉히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른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선생님은 참 무서웠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몇몇 학생들을 불러 ‘오늘부터 우리는 칠판을 만드는 거다’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뿐, 우리는 선생님과 더불어 정신없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동안 학교는 폭격을 맞아 다 타고 무너졌습니다. 수복이 된 다음 개교는 했지만 비가 오면 휴교를 했고, 날이 좋아야 겨우 운동장 가에 심겨있던 꽤 키가 큰 풀라타나스 나무 그늘에서 학급 단위로 옹기종기 모여 공부들을 했습니다. 거의 깨진 칠판 몇 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학시간에만 사용하는 것이어서 주번들이 이 나무 저 나무 밑으로 그것을 옮기곤 해야 했습니다.
그 무서운 선생님께서 칠판을 만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셨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보다 ‘젊은 놈들이 잘못 사는데 대한 분노’만을 토해내시면서 그에 걸맞게 잦은 매질에다 그 매가 맵기 짝이 없어 그 선생님을 조금은 경원하고 경멸했던 터라 그 일이 선생님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다고 느꼈던 까닭입니다.
아무튼 우리들 몇몇이는 선생님 심부름을 하면서 이른 가을부터 칠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칠판이란 판자에다 시커먼 칠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표현한다면 그것은 과학에다, 예술에다, 인내나 좌절하지 않음 등을 담은 도덕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허물어진 빈집들을 다니며 송판(松板)을 주워왔습니다. 그것을 물에 씻어 깨끗하게 하고는 그늘에서 말렸습니다. 아주 오래 마른 판자들이어서 그렇게 하면 곧 마를 뿐만 아니라 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빈집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도 있었습니다. 못쓰는 한지(韓紙)도 가져오게 하셨는데, 우리 몇 사람은 그 숙제물들을 정리하고 선생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일을 하면 되었습니다.
긴 과정 짧게 이야기하면 이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잘 마른 판자들을 대패질하시고 톱질하여 칠판 틀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한지를 몇 겹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석고를 바르셨습니다. 우리는 먼지 없는 그늘에서 석고가 잘 마르도록 정성을 다해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살피기도 하였습니다. 한데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판자가 서로 붙어 있는 틈을 따라 갈라지기기 일쑤였습니다. ‘허망한 일의 끝없는 되풀이’를 저는 제 생애에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다음으로 한 일은 검은 염료를 바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염료가 없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겪은 가장 ‘희한한 경험’은 이 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들르면서 무쇠 솥을 쓰고 계시는 집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허락을 받고 솥을 뗀 다음 굵고 누룽지 같은 글음을 걷어내고 솥바닥에 빠짝 붙어있는 가는 글음들을 솔잎으로 살살 통에 쓸어 담았습니다. 그 글음들은 곱고 순색으로 검었습니다. 그것이 준비되면 마침 익어가는 땡감을 따 즙을 내어 그것을 글음과 섞어 끓이는 아교에 넣어 마침내 물감을 만들어 잘 마른 석고판에 발랐습니다. 땡감 즙에는 탄닌(tannin)이 들어있어 방수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지금 기억되는 선생님의 설명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글음을 딸 때 일입니다. 그 일을 할 때면 선생님이나 우리나 모두 얼굴에 옷에 몸에 온통 검정 칠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마침 주인아주머니께서 들어오시더니 딱하고 기가 막히신지 불쑥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식 학교 보냈더니 솥 밑이나 긁게 하고....선생은 저 숯 강아지 꼴이 뭔가.......’
저는 당혹스럽고 송구스러워 얼른 선생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콧구멍까지 아주 새까맣게 검댕이 묻어 있었습니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너 꼭 숯가마 집 강아지 새끼로구나!’ 저도 말했습니다. ‘선생님도요!’ 우리는 모두 커다랗게 웃었습니다.

며칠 전에 학회가 있어 어느 대학에 갔었습니다. 새로 지었다는 세미나실이 첨단적인 시설에 실용적이고 화려하고 안락했습니다. 갑자기 옛날 칠판 만들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시설에서도 공부를 안 한다면 천벌을 받아야지!’하는 생각이 났지만 차마 발설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무섭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저리도록 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 선생님. 우리 선생님!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152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다  정진홍 05-10-14 2157
151 이상한 이야기  정진홍 05-10-14 2185
150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정진홍 05-10-14 2206
149 아, 선생님. 우리 선생님!  정진홍 05-10-14 2231
148 사람살이와 짐승살이  정진홍 05-10-14 2115
147 보자기 이야기  정진홍 05-10-14 2333
146 말과 셈과 몸  정진홍 05-10-14 2046
145 노인과 노인다움  정진홍 05-10-14 2114
144 정진홍 교수가 읽은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책 몇 권  정진홍 05-10-14 2202
143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정진홍 05-10-14 2098
61626364656667686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