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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정진홍   |  2005-10-14 13:40:33  |  조회 2207 인쇄하기
강원도 고성에서 온 ‘함경도 아바이’ 고 상병이 본부에 불려가 몰매를 맞고 내무반으로 돌아온 것은 일요일 밤이 아주 늦은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내무반 불침번을 서고 있었습니다. 눈두덩은 퍼렇게 피멍으로 부풀어 올랐고, 얼굴과 가슴은 코피로 뻘겋게 물든 그가 손을 뒤 허리에 댄 채 간신히 걸음을 떼며 내무반에 들어섰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심하게 당하리라는 생각은 못했었습니다. 두 손을 저으며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저는 대야에 물을 떠다 얼굴을 씻어주고 옷을 벗겨 피 묻은 곳을 지르잡았습니다.
고 상병을 자리에 눕히고 나서 다시 총을 메고 통로를 뚜벅거리며 오가면서도 저는 속에서 격하게 솟아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곤히 잠든 박 병장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잠든 상급자를 깨운다는 것은, 그것도 ‘아무 일’도 아닌데 깨운다는 것은, 더구나 항변을 하기 위해 깨운다는 것은,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는 일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는 부대배치를 받은 지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갓 일등병 계급장을 단 ‘기록카드 잉크도 마르지 않은 졸병’이었습니다. 머리가 쭈뼛해지고 숨이 거의 막힐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박 병장을 깨웠고, 당신 때문에 고 상병이 저렇게 매를 맞았는데 잠이 오느냐고 따졌습니다.
사정은 이러했습니다. 주말인데 박 병장은 외출 순서가 되지 않아 부대에서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박 병장은 오갈 데 없고 용돈도 없는 고 상병의 외출증을 가지고 그의 군복을 입고 그의 군번을 달고 나가 어느 술집에서 술을 먹고는 돈을 내지 않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주인이 헌병대에 신고를 했고, 헌병대는 우리 부대 본부에 고 상병의 인적사항을 통지해온 것입니다. 귀대 시간이 지나고 오래지 않아 고 상병이 호출을 받았을 때 우리 모두는 일이 벌어졌구나 하면서 사태를 짐작했습니다. 박 병장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 병장이 본부에 가서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박 병장은 부대 내에서 전우들로부터 조금은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몇 명 되지 않는 대학 졸업생이라는 것 말고도 그를 ‘우러러보도록’한 것은 더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몇 되지 않는 문예지에 시를 싣고 있었고, 소설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장교들조차 박 병장을 ‘함부로’ 대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외출을 해서도 그를 아는 다른 민간인들과 어울리게 될 때면 박 병장과 같은 부대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한 무지가 천박한 교양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인 양 떠들어댔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사람이었고, 그의 소설이나 시에서 전해오는 저리도록 아픈 휴머니즘(저는 지금 그렇게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에 너나없이 상당한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박 병장은 불려가는 고 상병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나 대신 몇 대 맞고 와라!”
그렇게 말하고 피식 웃었다고 쓰고 싶은데 정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뜻밖에 박 병장은 저에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매를 맞지도 않았고, 욕도 먹지 않았습니다. 몸을 모로 누이며 한 이야기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보초 똑똑히 서라!”

고 상병이 결혼휴가를 받고 우리가 있던 부산 부대를 떠나 고향 고성에 다녀온 날, 전우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그야말로 ‘난리’를 쳤습니다. 저도 괜히 즐거웠습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서둘러 장가를 들게 되었다는 사정은 알았고, 또 내키지 않는 결혼이지만 부모님을 모실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떠난 터라 걱정이 되었지만 우리에게 전우의 ‘결혼’은 흥겨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고 상병이 저를 부대 한구석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 결혼 안 하고 왔다.”
“….”
“고향에 도착하고 나서 곧 그 처녀를 만났어. 그리고 아끼고 아낀 돈을 고성 읍내로 혼인하러 올 때 부모님 모시고 버스 타고 오라고 교통비로 주었어.”
고 상병은 한동안 담배만 빨았습니다.
“결혼 전날 밤에 우리 둘은 바닷가를 거닐었어.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지만 잘 살자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바다를 바라보며 둘이 멍하게 앉아 있는데 갑자기 이 처녀가 부스럭거리더니 주머니에서 무얼 꺼내는 거야. 그러더니 나한테 보여주면서 얼굴에 바르는 구리무(크림)라는 거야. 요전에 준 돈으로 생전 처음 결혼식 때 바르려고 샀다는 거야. 그 순간, 왜 그리 화가 나던지…. 꼭 배신당한 것 같았어. 부모님은 걸어오셔도 된다는 거야, 늘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구리무를 빼앗아 바다에 던져버리고 말았어. 그러고는 나 결혼 안 한다 하고 와버린 거야….”

45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허구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분명한 것은 박 병장은 이제 누구나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지만 저는 그의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 상병의 소식은 이처럼 아쉬울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곧 제대를 한 터여서 지금쯤 손자 손녀를 수두룩 두고 두 내외가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소문할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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