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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기(禁忌)의 구조
인간의 삶 속에 ‘차마 건드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차마 건드릴 수 없는 것을 자기네 삶 속에 마련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범하면 ‘죽으리라’고 선언하는 관행을 규범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지극한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인간이 무척 나약하다고 판단하든 몹시 도도하다고 생각하든 이 일이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릇 금기는 경원(敬遠)의 부정적 표상입니다. 경원의 긍정적 표상을 외경(畏敬)이라고 한다면 그 차이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문제는 그 금기가 역설적인 희구를 스스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두려움의 표상입니다. 건드리면 부정(不淨)을 탑니다. 오염과 얼룩이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기의 파괴는 마침내 자신의 파멸에 이릅니다. 금기는 그러한 경고로 자신을 어마어마하게 치장하고 있습니다. 공포와 압도하는 불가항력적인 힘 앞에서 겪는 속수무책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금기를 범하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존재의 소멸’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금기로 울이 처진 그 안에 있는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한시도 잊을 수 없도록 합니다. 그것은 인식을 충동하고 모험을 자극합니다. 그러한 동기들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존(自尊)조차 느낍니다. 아예 자존(自存)이라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금기를 범하는 일은 성숙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미지가 그 너울을 벗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확보되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확인하게 되고, 그 안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자아를 통해 자신의 삶을 다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깨지지 않는 금기는 금기가 아니다’라든가 ‘금기는 깨지기 위해 있다’는 말에 담을 수 있습니다. 금기는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지만 범해지지 않는 금기는 이미 금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굳이 금기라 이름 할 까닭이 없습니다. 금기는 법과도 다르고, 도덕적 덕목과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금기의 문화, 또는 금기의 역사는 끊임없이 범해지는 금기를 여전한 금기로 지키려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금기는 있지만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입니다. 부연한다면 없지만 있습니다. 금기의 현존은 문화의 생존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인간의 삶에 대한 총칭입니다.
그렇다면 금기의 소멸은 문화의 소멸, 아니면 생존방식의 붕괴와 다르지 않습니다.
2. 죽음, 그 금기의 현실
소박한 실재론의 자리에서 보면 죽음처럼 분명한 ‘사실’은 없습니다. 엄밀한 인식의 자리에서 볼지라도 죽음은 실증을 요하지 않을 만큼 뚜렷한 ‘현실’입니다. 의식의 지각 차원에서 보더라도 죽음을 감지한다는 것은 지극한 ‘일상’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그 현실을 기술하며, 그 일상을 경험합니다. 죽음을 낯설어 하는 일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과의 관계가 이러하다면 우리는 죽음과의 관계를 ‘거의 아무런 물음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도 될법합니다. 우리가 물음을 묻는 경우란 그것이 무언지 모르고, 판단이 곤혹스럽고, 수용이 불가능할 경우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과 익숙하게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죽음과 무관한 삶을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이제까지 우리가 언급한 사실과 전혀 다른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낯설기 짝이 없는 ‘비일상적인 것’이고, 죽음은 끝내 불가해한 현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사실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생각의 끝은 그 실마리가 무엇이든 언제나 죽음에 이르고, 물음을 거듭하다보면 그 물음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 끝도 죽음에 가 닿습니다. 몸의 종말이 그러하고, 마음의 결이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일상에 담을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미지의 현실이고 두려움입니다. 자연히 죽음을 부정하고 싶고, 죽음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부정직하고 비현실적인가 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끝내 불안합니다. 그것은 수용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바로 이 언저리에서 죽음은 금기로 울이 쳐집니다.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공연히 건드려 지례 겁을 먹기보다 만날 때 만나더라도 지금은 피하고 싶어 그 금기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가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만나 밝히는 것이 오히려 좋으리라는 생각이 또 다른 마음결입니다. 이 역설을 그대로 안고 죽음은 금기된 주제로, 금기로 치장된 현상으로 아득한 때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매우 조심해야할 이야기 주제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음담론은 죽음을 내용으로 하는 ‘재앙’에 이르는 것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죽음은 이야기의 주제가 되지 말아야 했고, 죽음을 시사하는 어떤 낌새도 관용되지 못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논의는 적어도 그것이 이야기를 통한 진술인 한, 충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허언의 축적으로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죽음은 다만 단정적인 규범적 선언에 담길 뿐, 묻고 추구하고 찾아 나아가는 논리에 실리지는 않아야 하는 것으로 전제되곤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언어적 진술은 철저하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은 언어의 한계가 아니라 인식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었고, 불가해한 사실이라는 것을 다르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은 산문의 논리에 자신을 싣지 못했습니다. 그 논리를 뒷받침할 실증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접하고, 느끼고, 예상하고, 상상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시적 상상력의 언어로 다듬어지곤 했습니다. 어쩌면 고백의 언어에 담길 수 있을 뿐이라든지, 그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그러한 현상으로 죽음담론은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상상력의 언어에 의한 죽음진술은 금기를 깨트리는 듯 하면서도 그 금기의 울 밖에 서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죽음을 만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막상 일어난 죽음사건은 온갖 잘 다듬어진 의례를 통해 다루어졌습니다. 그 의례는 온통 비일상적인 몸짓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비일상적인 형식’은 죽음을 여전히 금기 안에 두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비일상적인 설명도 아울러 그 형식화된 몸짓을 치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몸짓에 대한 실증할 수 없는,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의미론들이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형식과 의미론을 통하여 사람들은 죽음에 다가가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죽음금기는 의례를 통해 그 현존을 지탱하면서도 동시에 그 금기의 파괴를 드러내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논의’ 속에서 모두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례에 담깁니다. 의례를 통해 죽음은 금기에서 풀려나면서도 여전히 금기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례는 실은 ‘비일상성의 일상화’입니다. 여느 때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것이 의례입니다. 장례(葬禮)와 상례(喪禮)를 결한 문화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의례를 통하여 우리는 죽음을 ‘의미화’합니다. 죽음을 승인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례의 수행은 여전한 금기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와 실증할 수 없는 의미와 다가갈 수 없는 외경, 그리고 이제는 마음 놓을 수 있는 안심과 모든 것이 투명해진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이루어질 새로운 실재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함께 소용돌이치며 이루어집니다. 죽음은 그 의례를 통해 비로소 그 금기다움을 유지합니다. 인류의 죽음문화는 이렇게 진전되었습니다. 금기를 결한 죽음은 죽음다움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것은 의례에 담기지 못하는 죽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그러한 현상인데, 그것은 죽음의 자리(topos) 잃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죽음은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 되는 현상(legomena)’만이 아니라 ‘몸짓을 통해 구체화 되는 현상(dromena)’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죽음은 아직 우리 현실 안에서 상당한 세월을 금기로 지탱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3. 오늘, 죽음의 현실
죽음은 일상입니다. 오늘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에서부터 ‘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음은 낯설지 않습니다. 때로, 그리고 절박하게, ‘내 죽음’도 머리를 들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겪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죽음이라는 언어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아울러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등장하는 다른 언어의 출현을 목도합니다. ‘건강’이라는 언어, ‘치유’라는 언어, ‘평균수명’이라는 언어, ‘노년’이라는 언어, ‘복지’라는 언어, ‘정책’이라는 언어 등이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 대신 ‘생명의 관리’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즐깁니다. 그 ‘관리’에는 정치, 경제, 과학 등이 모두 참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는 효과적으로 ‘죽음’을 주변화(周邊化)합니다. 죽음이 주제하(主題化)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차단합니다.
이를테면 ‘나는 내가 죽을 것을 알아!’하는 발언이나 태도는 그것 자체로 승인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발언주체의 성숙하지 못함에 대한 연민과 경멸이 흐릅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태도가 지닌 전근대성의 자취를 안타까워합니다. ‘나는 존엄한 죽음을 죽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온갖 ‘체제(system)’가 한꺼번에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료혜택과 보험의 지급과 고통 없음과 건강의 지속과 편리한 장례와 생산적인 주검처리와 법률적인 갈등 없는 죽음 이후와 종교적으로 제각기 정형화된 사후(死後)의 세계를 약속하는 것으로 구체화합니다. 죽음은 이미 그 독자성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죽음은 ‘논의하여 결정’되는 현상입니다. 주검은 ‘처리해야 할 쓰레기’입니다. 의례는 ‘편의를 위한 절차’입니다. 위로는 ‘보상받아야 할 금전’입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이 없는데 죽음금기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죽음금기는 이미 ‘오늘’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마 건드릴 수 없음’이 주는 역설적인 구조 안에서 솟는 의미를 기대하는 것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보면 소박하게 ‘비인간적’입니다. 그것은 아예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것은 유치한 문화의 잔존을 지속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담론을 전유(專有)한다고 할만 했던 종교들도 서둘러 죽음담론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런 감동도 전해주지 못하는 ‘유치한 이야기’가 된지 오래입니다. 피안에 대한 담론은 차안에 대한 관심이 성숙하지 못한 미성숙한 환상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적 덕목은 ‘지금 여기’를 축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 저기’는 당연히 어서 벗어나야 할 어린 흔적일 뿐입니다.
생명의 논의가 새삼스레 활발합니다. 그 개념이 담는 대상의 개념적 외연은 인간을 넘어 ‘만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개념자체는 죽음을 전제하거나 함축하지 않습니다. 생명담론은 생명의 존엄을 힘주어 말하지만 죽음을 담지 못하는 색깔로 그려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존엄한 죽음’이란 낯선 그림입니다.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가 ‘죽음을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또 다른 당위를 지우는 에토스는 죽음담론의 전유자인 종교의 자존심을 위해 쓸쓸한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그 먼 결과로 ‘희생’조차 부도덕한 덕목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게다가 의례는 금기가 담고 있는 의미화의 터전을 상실하는 것도 모른 채 경제논리를 모창(模唱)하고 있습니다. 모든 죽음의례는 그것이 장례의례든 제사의례든 한결같이 생산성과 효율, 그리고 편의에 의해 평가되고 구조화됩니다. 금기로 울이 쳐진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몸짓과 색깔과 형태와 시간과 공간의 상징적 의미는 그러한 해석 기준에 의하여 다른 의미를 낳습니다. 그리고 다른 실천을 요청합니다. 의례의 맹목적 관성화(慣性化)와 단순화는 불가피합니다.
언어 속에서도, 의례 속에서도, 죽음은 금기의 울을 벗고 황량한 나신으로 차디찬 인식의 객체, 아니면 다루어야 할 부정적인 ‘사태’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은 이미 차마 건드릴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스스로 차지한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경험 속에서 죽음은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죽음은 아무데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습니다. 조금 ‘우습게’ 묘사해보십시다. 병원에는 오늘도 사망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치료의 한계를 겪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고속도로 위에도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를테면 과속이 낳은 ‘사고’의 희생자가 있을 뿐입니다. 신속한 처리와 보고 되는 수자가 있을 뿐 죽음은 없습니다. 연장되고 연기되어야 할 생명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경우’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여전한데 죽음을 이야기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Ivan Illich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있는데 없다고 하는 문화 속에서 죽을 수 있는 능력의 결핍’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1)
4. 죽음담론, 그 학문성의 요청
거대한 체계 속에서 죽음은 자신의 자리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보면 죽음은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금기가 걷힌 죽음이 그러합니다. 방법론적으로 말한다면 환원론(reductionism)은 불가피합니다. 죽음은 생리현상일 수밖에 없고, 경제현상일 수밖에 없으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이를 모두 포함한 문화현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죽음인식을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다양한 죽음서술을 통하여 어쩌면 총체적인 죽음담론을 펼칠 수 있으리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 당연히 그러한 현상의 문화-역사적인 변화도 주목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따라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을 금기현상으로 보는 것은 ‘고대적’이거나 ‘전근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하는 현대의 죽음담론은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해 적합성을 가진 가장 효과적인 죽음담론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론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죽음담론은 죽음의 필연성을 자기 관점이나 맥락에 넣어 자기주장을 위한 부수적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논리적으로 본다면, 그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죽음이 부정되는 듯한 경향의 문화적 에토스를 낳습니다. 치료만 잘 한다면 죽음은 없습니다. 교통질서를 잘 지키면 죽음은 없습니다. 결국 죽음은 잘못된 현상이 낳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죽음은 없습니다. 또한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정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을 본유적인 것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오늘의 삶을 위해 정당하다고 하는 논의의 흐름은 불안합니다. 까닭은 간단합니다. ‘죽음은 생명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정직한 인식이 아닙니다. 죽음 양태에 대한 서술이나 설명이 죽음부재를 선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러한 진술이 오히려 사태를 그릇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기술들이 죽음을 배제하거나 부정하는 담론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으냐는 반론은 언제나 정당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직접적으로 단언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의 죽음담론을 다시 앞서 언급한 맥락을 따라 말한다면 그것은 ‘생명을 관리할 수 있다’는 ‘신조(dogma)’에서 비롯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죽음은 언젠가는 ‘나의 죽음’으로 귀결한다고 하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율적인 자아를 이루고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그러한 ‘신조’를 수행하는 일과 ‘나의 죽음마지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입니다. 죽음은 어떻게 그 현존양상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종국적으로 내가 만나는 나만의 일로 우리에게 경험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존엄을 위해 생명을 관리할 수 있다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살인과 자살의 빈발은 오히려 그러한 에토스와 관련하여 문제를 추적해볼 수 있으리라는 예상을 우리에게 시사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죽음과 죽음담론과 오늘의 죽음현상에 대한 ‘정직한 기술(記述)’을 요청합니다. 죽음학이 가능하다면 그 소임은 바로 이런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학은 죽음을 분명한 인식의 객체로 정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현상에 대한 의학적 기술을 의도하거나 죽음의 사회학을 진술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백을 다듬어 간직하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죽음관을 전파하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학문은 현존하는 현상에 대한 물음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미 물음이 도달한 해답에 대한 되물음이 학문의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죽음학은 현존하는 죽음담론의 어느 것을 지지하거나 거절한다든지, 어느 주장을 진전시키거나 어느 주장에 대하여 비판적 인식의 논리를 전개한다든지 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작업을 포함하겠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직면한 죽음문화자체를 묻는 일입니다. 쉽게 나누어 서술한다면 정치, 경제, 과학적인 죽음담론의 개념과 논리,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규범적 가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울려 이루는 우리의 죽음문화에 대한 되물음을 수행하는 일이 오늘 우리의 죽음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죽음학의 논의는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개개인의 실존적 성숙이 이루어지면서 묘연한 죽음의 행방을 자기 삶의 자리 안에, 우리 공동체의 삶의 자리 안에, 정치(定置)하도록 하는 일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접근은 죽음담론의 배타적 전유를 주장하는 종교적인 진술에 대해서도 되물음을 발언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논의의 비현실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의례를 통한 죽음담론을 구체화한 종교의 죽음서술구조도 밝혀야 하고,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죽음이후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신의 현존을 실제적으로 확장했던 종교의 역설도 살펴 그 현실적인 뜻을 밝혀야 하고, 죽음을 저주와 징벌로 이야기하면서도 죽음 없는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역설을 주장한 종교의 가르침도 되살피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더구나 그 여러 종교들의 주장이 ‘산재한 절대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는 현실 속에서 그 주장들의 의미론이 어떻게 오늘의 삶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지도 살피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작업, 곧 묘연해진 죽음의 행방을 찾기 위한 작업이 이른바 ‘금기’의 재현을 의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종교의 죽음담론은 그 나름대로 죽음을 금기의 울에서 벗어나게 한 분명한 진술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관리’하겠다는 일연의 거대한 체계도 충분히 금기를 벗겨버린 ‘성공적인’ 문화입니다. 이제 죽음은 금기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금기에서 벗어난 죽음에 관한 담론, 그것에 대한 담론’이 이제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과제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죽음을 금기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두렵고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가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죽음과 죽음이후에 대한 분명한 선언들로 종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과학도 이를 상당한 정도 성취했습니다. 생명공학이 쏟아내는 온갖 새로운 개념들은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서부터 죽음인지’를 묻는 물음부터 ‘죽일 수 있음과 죽을 수 있음’에 대한 물음에 이르기까지 금기의 설정만으로는 짐작도 하지 못한 사태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관리뿐만 아니라 주검의 관리조차 새로운 산업을 낳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과에 대한 담론이 이제 우리의 과제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제각기 다른 자리에서 죽음은 여전히 기술되고 탐구되고 해석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죽음담론은 그 모든 견해들이 통합하여 이루는 거대한 체계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죽음학이 모색하는 죽음담론은 그 체계자체, 아니면 ‘죽음문화의 구조와 현상’ 자체에 관한 것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5. 죽음학의 한계와 가능성
죽음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죽음을 인식의 객체로 놓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실증을 준거로 한 인식론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박한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실증의 범주 안에 들지 않습니다. 죽음자체를 운위하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마치 ‘기원론의 현실’처럼 그것은 그럴 듯한 주제이지만 결국 자신이 지닌 형이상학적 전제를 서술하고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현상만을 기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이 ‘무엇이다’라는 진술은 작업가설적인 것의 범주 안에서만 타당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술하는 어떤 죽음담론도, 그것이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인 한, 실은 ‘짐작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죽음 담론의 마지막은 언제나 ‘인식된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그렇다고 승인한 사실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야 더 옳습니다. 그렇다면 죽음학은 그것이 죽음현상이 아니라 죽음자체를 알고자 하는 한, 구조적으로 ‘인식의 한계’를 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박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죽음담론은 학문의 자리에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죽음담론의 불가능성이나 비현실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죽음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학이 학문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죽음학을 위해 근원적으로 요청되는 격률(格率)입니다.
그러나 죽음학이 결과적으로 ‘인식’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죽음학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러한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무릇 실증되는 것은 의미의 한계를 가지지만 실증되지 않은 채 고백을 통해 승인된 사실에 대한 진술은 의미의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식이 도달하려는 종국적인 지향은 의미의 확보에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인식의 객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해석의 객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기호적 사실’이 아니라 ‘상징적 사실’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물 지시적(事物 指示的)인 것을 기호라고 개념화한다면 상징은 이와 관련하여 무한한 해석의 실체로 있어 결과적으로 다가성(多價性)이나 다의성(多義性)을 수반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죽음은 생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보편적인 진실을 바탕으로 서술할 수 있다할지라도 여전히 실존적인 자리에서는 제각기 다른 의미로 경험되는 마지막 사건입니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체계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가지는 상징성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죽음행방의 묘연함은 오히려 그것이 상징이라는 사실 속에서 되찾아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학은 해석학(hermeneutics)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접근도, 사회학적인 접근도, 과학적인 접근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죽음담론자체에 대한 의미론의 모색입니다. 이렇다고 하는 주장은 죽음학이 스스로 자신의 이념적 정초를 주장한다거나 죽음학이 규범적 선언을 의도하는 지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죽음학에 대한 비난과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난은 곧 죽음학의 비학문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죽음이라는 주제가 Heidegger가 언급한대로 ‘존재물음이 지닌 존재적 우위’라는 자리에서 답변할 수 있을 듯합니다.2)
죽음은 그러한 물음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해석학은 실은 모든 죽음담론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죽음학의 우선하는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죽음학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학은 죽음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죽음담론을 위한 기초의 제공이라는 두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존엄하게, 의연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은 희구와 삶을 그렇게 죽고 싶은 희구가 죽음학에 대한 기대임도 첨언하고 싶습니다. *
1) Ivan Illich, "Death Undefeated", British Medical Journal, vol. 311, no. 7021(23-40 December 1995) <녹색평론> 2004년 3-4월 통권 제 75, pp. 174-178에서 인용.
2) der ontische Vorrang der Seinsfrage. M. Heidegger, SZ. Tubingen: Max Niemeyer, 1972.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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