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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운전하는 일이 점점 싫어집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습니다.
연전에 아이엠에프 사태로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 마침 저는 안식년을 맞아 외국에 1년 동안 가 있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마지막으로 차도 팔았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다른 사람에게 쓰게 하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나아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만 실은 그 무렵 차를 운전하는 일이 조금씩 불편해진 것이 속내였습니다.
꽤 긴 기간동안 차를 운전해서 어느 정도 자신도 있고, 차와 내가 한 몸이 된 듯한 편리함도 누렸었는데, 알 수 없이 차를 운전하기가 점점 싫어졌습니다. 틀림없이 나이 탓이라 여깁니다만 아무튼 낮이면 교통이 번잡해 운전하기가 힘들어 싫고, 밤이면 어두워 거리를 짐작하는 것이 쉽지 않아 싫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와서 위험해 싫고,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싫었습니다. 누가 들으면 그러한 때야 말로 자가용을 운전하고 다니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편리하기 그지없는 때라고 할 터인데 저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차가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짐처럼 그렇게 불편하곤 했습니다.
한데 떠나기 전전 날, 그 사태로 교수해외파견계획이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외국 대학에 이미 연구실과 아파트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차를 운전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는데 어찌나 자유로웠는지요. 처음에 차를 마련했을 때는 차가 있어 날개를 단 것 같았는데, 차를 없애고 나니 이번에는 차가 없어 날개를 단 듯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차를 마련했습니다. 아내의 강권을 이른바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마지못해 받아드린 것인데 막상 차를 운전하며 다녀보니 처음 차를 샀을 때의 가벼움은 아니더라도 차를 사용하지 않다 다시 쓰면서 경험하는 또 다른 상쾌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마치 없던 기쁨을 누리는 듯 만족스러워 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하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게다가 이 번에 산 새 차는 여느 차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두루 사용하는 승용차에 비하면 생긴 꼴이 둔탁하기 짝이 없는데다 키도 덩그마니 높고, 타이어도 넓적하고 커다란 이른바 광폭에다 사람을 태우려면 앞자리를 누르고 뒤편으로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고, 소음도 승차감도 다른 승용차에 비할 수가 없는 흔히 말하는 찝차, 그것도 아주 ‘고전적인’ 찝차였습니다. 이제는 단종(斷種)이 되어 나오지도 않습니다.
사실은 아내가 다시 차를 사자고 했을 때 저는 모처럼 얻은 ‘차로부터의 자유’를 상실할 사태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살 바에는 아주 작은 차를 사자고 우겼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차를 시동을 걸어 아무리 발진을 하려해도 움직이지 않아 내려서 바퀴를 보았더니 껌이 붙어 있더라는 바로 그 차를 사자고 한 것입니다. 차 크기가 안전에 비례한다고 믿는 아내의 기막힌 ‘상식’을 역이용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 반격은 제법 효과를 내는 듯했습니다. 적어도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사람의 변이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자 아내의 ‘타박’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타협이 불가피하겠다는 사태를 짐작한 저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역공을 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살 바에는 아주 탱크 같은 차 한 대 사자!’고 내 뱉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저는 아내의 퇴근 독촉 전화를 받고 놀라 집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에서 아내는 바로 그 예의 찝차 옆에서 득의의 웃음을 웃으며 서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처참한 패배를 했는데도 새 차에 대한 호기심은 갑작스러운 첫 사랑처럼 저를 들뜨게 했습니다. 직장에 처음으로 이 차를 몰고 등장한 날, 동료들이 저를 힐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네가 무슨 터프 가이라고 그런 차를...’ 그렇습니다. 저는 이 차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보다 늙었기 때문입니다. ‘늙은이와 탱크 같은 차’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네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요. 또 얼마나 많은 ‘엉뚱한’ 상식 때문에 바른 인식이 일그러지는지요.
저는 늙음과 탱크라는 대칭적 구조를 벗어나면 얼마나 많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지를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아니, 어쩌자고 차에 기어 들어가니? 올라타야지!’ 에서부터 제각기 잘났다고 쪽 빠진 몸매를 자랑하는 차들 속에서 ‘최고’가 되지 못해 억지로 ‘실용성’ 운운하며 자기 정당화를 하느라 피곤하기보다 땅 바닥에 납작 깔린 차들을 내려다보며 확 트인 앞을 질주하는 기분을 아느냐고 큰 소리 치는데 까지 이르고, 이에서 더 나아가 승차감이나 소음을 지적하는 친구들에게는 ‘사나이 기상이 가마타기보다는 자기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야 하는 것 아냐?’에 이르기까지 제 설명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이 차는 늙은이를 위한 차야!’
그런데 운전하기가 점점 싫어집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운전을 즐기는 것은 나만의 ‘세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운전하는 일이 조금 힘들다 하더라도 차를 몰고 다니면 출퇴근하는 긴 시간에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 안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음악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전축도 마음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차 안에서는 마음껏 크게 들을 수 있습니다. 소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방송도 들을 수 있습니다. 집안에서 그렇게 선국(選局)을 하면서 여러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인데, 차만 타면 그것이 일상이 되고, 또 즐겁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분들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큰 소리로 노래도 하고, 때로는 마음껏 ‘절규’도 합니다. 평소에는, 더 정확하게는 자가용 밖에서는, 결코 하지 못하는 짓을 합니다.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밉다고 격렬하게 욕도 합니다. 참 좋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내어 가야하는 길인데, 그 시간 동안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를 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자가용 홀로타기족의 배타적 폐쇄성은 바로 그러한 ‘자유에의 절실함’에서 비롯한 불가피한 필연인지도 모릅니다. 홀로 타는 자가용은 그대로 ‘절대공간’입니다. 그러니 자가용 함께 타기를 권유하는 안내문이나 전단을 받을 때 죄의식을 갖기도 하지만 자가용 홀로타기가 주는 ‘유혹’과 ‘범죄’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지닌 차 안에 들어서면 그 순간부터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도 아무 탈 없는 숲에 들어선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는 것 참 안됐습니다. 함께 어울려 소용돌이치는 삶 속에서 자기 만의 공간을 확보하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아쉬운지요. 자가용 혼자타기가 주는 축복은 어쩌면, 매우 비민중적이고 비환경친화적인 발언일 것이지만, 바로 이러한 공간의 확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묘사해도 차 홀로타기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를 ‘표류하는 섬’이게 합니다. 어차피 사람살이는 ‘산재한 섬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런 채 서로 잇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 살아가는 것인데,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은, 그것도 홀로타기에 탐닉해 있다는 것은, 그 잇는 물길조차 거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차에서 나와 홀로타기를 유보해보면 자신이 얼마나 ‘표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면 사람 냄새가 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읽으면서 저는 참 많은 이야기를 홀로 지어냅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거기 있으면서 비로소 제가 사람들 틈에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때로 지하철에서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사람과 더불어 창에 비치는 것조차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문득 자가용 홀로타기를 하면서 절규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어리고 못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차를 모는 것이 싫어지는 것은 이제까지 충분히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해온 내 삶의 흔적이 역겨워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문한다는 것이 그랬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공간을 확보하고 아무도 없는 바로 그 ‘절대적인 폐쇄공간’에서 제법 그것이 삶 전체인 양 떠들어댄 나르시시즘, 그것에 도취되었던 너무 긴 세월을 이제 겨우 벗어난 너무 늦은 아쉬움, 그것이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일이 점점 싫어지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사람냄새가 물씬한 공간으로 들어가 마지막 학문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서둘러 바꾸어야 할 듯합니다.
며칠 전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습니다. 반응이 참 간단하더군요. ‘쓸데없는 철학하지 말라고. 몸 늙어 삐걱대니 차 운전하기 겁날 것 뻔하고, 지하철 거저 타고 다니니 돈 들지 않아 더 없이 즐거운 거고........그런 거지 뭐!’
하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그 탱크 같은 차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불쑥 어느 날 혼자 몰고 나가 ‘절규’할 것이 남아있기 때문이겠는데, 아무튼 차는 ‘애물단지’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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