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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생긴 다음부터 제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논문 마감은 바짝바짝 다가오는데 글의 틀조차 잘 잡히지 않을 때면, 사랑하는 아내에게조차 온통 못된 성미를 부리는 것이 제 삶입니다. 그러다가도 자식 내외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없다는 전화가 오면, 저는 만사 제쳐 놓고 “그러마” 합니다. 그러고는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은 시간을 어쩔 줄 모르고 서성입니다. 그 시간이 어쩌면 그리도 행복한지요.
이런 말을 하면 어찌 그리 ‘치사’하게 늙느냐고 농을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또 “조금만 지나봐라. 짝사랑하다 아프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랑하거라” 하고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런 농이나 충고는 그럭저럭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손자가 왜 그리 좋은지 까닭을 말해 보라고 들이대는 친구에게는 도저히 제가 참지 못합니다. ‘아니, 까닭을 물을 게 따로 있지 할아비가 손자 좋아하는 데도 까닭이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화가 납니다.
그 친구에게는 손자를 아끼는 제 모습이 동물적이거나 본능적인 것 같아 유치하고 못마땅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욕심스러운 본능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본능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본능이 이루어내는 애정은 ‘황홀한 신비’라고 해도 좋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 학교에 있을 때 하루는 잘 아는 남학생이 연구실에 들렀는데 얼굴이 어두웠습니다. 짐작되는 일이 있어 물었습니다. “여자친구하고 삐거덕 했구나?” 거두절미하고 그 남학생의 대답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충분히 서로 이해할 만큼 사귀었고, 정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여자친구가 견딜 수 없이 좋았기에 용기를 내어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의 반응을 보이더군요.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왜 나를 사랑하는지 설명해 봐’ 그러더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그 뒤로 지금까지 3주동안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남학생에게 그랬습니다. “잘했다”
황홀한 신비를 설명하라는 똑똑한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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