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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기억
30여 년 전 토요일, 정확하게 말하자면 1975년 4월 30일 오전 10시 45분. 2 대의 월맹군 탱크가 사이공에 있는 월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했다. 곧 이어 월맹군 두 명이 탱크에서 내려와 대통령궁에 월맹기를 게양했다. 대통령궁 수비대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미 대통령궁을 점령한 월맹군은 거침없이 대통령궁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간에 월맹군은 일사천리로 사이공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권력 이양 행사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날 대통령궁에 들어갔던 월맹군 최고위 장교는 부틴(Bui Tin) 소령이었다. 그는 이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자 그 곳에 있었던 그들(월남 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모두 일어나서 부동의 자세로 나를 맞았다. 나는 그들 속에서 월남 대통령인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을 발견했다. 그는 내 앞으로 걸어나와 ‘아침부터 기다렸습니다. 정부를 이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당신이 우리에게 넘겨 줄 정부 같은 것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라고 응답했다.”
항복만 생각했던 대통령
월남 공화국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몇 주 전부터 이미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당시 월남 대통령이었던 구엔 반 티우(Nguyen Van Thieu)는 사이공이 함락되기 10여일 전에 국외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두옹 반 민은 항복할 방법만 찾고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나기를 바랬다. 그는 그것만이 사이공을 지키고 민간인의 희생도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미군이 이미 사이공을 떠났기 때문에 월남군이 혼자 힘으로 월맹군을 막는다는 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같았다. 두옹 반 민은 도저히 월맹군과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정부를 메콩강 삼각주로 옮기고 그곳에서 군사 게릴라전을 펼치자는 참모들의 건의도 무시해 버렸다.
"사이공 괴뢰 정권은 무너졌습니다"
월맹군은 두옹 반 민을 방송국으로 끌고 가서 “오늘 사이공의 괴뢰 정권은 무너졌습니다.”라고 방송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그 정부를 스스로 “괴뢰정부”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중무장한 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던 백만 명 이상의 월남군들은 그 방송을 듣고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도 무기를 내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혈기 왕성한 일부 젊은 장교들은 자살하기도 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충성했던 정부가 스스로를 “괴뢰 정권”이라고 방송했다는 것은 그들이 설 땅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월맹의 보 반 키에트(Vo Van Kiet) 수상은 “두옹 반 민의 그 방송은 우리들의 근심을 씻어 주었다. 만일 월남군이 게릴라로 돌입했었다면 지루한 전쟁은 그대로 계속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진정한 화해
사이공은 일순간에 소리 없이 점령되었고 월남 정부도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은 승자와 패자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수십만 월남군 장교들과 관리들은 즉시 투옥되었고, 오랫동안 사상 교육과 육체 노동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석방된 사람들도 거의 폐인과 다름없었다. 또한 월남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분 조사가 철저하게 실시되었으며, 수백만 명은 "보트 피플"이라는 슬픈 운명을 택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승리자들은 자축의 노래를 부르며 “과감한 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아직도 전투적 구호와 군가가 소리높이 울려퍼지고 있으며, 수많은 월남인들은 여전히 “침략자의 하수인”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최강의 미군을 몰아낸 그 전쟁을 역사적인 승리라고 자랑하고 있다. 충분히 그럴 만 하다. 그러나 남북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승리자의 "축제"만이 풍성할 뿐이다. 이것이 30년 전의 사이공과 지금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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