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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EU
며칠 전 미국의 한 일간지는 “개별 국가의 민족주의가 EU 헌법을 좌초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로마의 한 가게 주인은 “브뤼셀의 유럽 위원회 인사들이 이탈리아 상품의 특성을 알 리 없다!”면서 다음 사례를 덧붙였다. 2년 전 EU에서는 모짜렐라 치즈를 유효 기간이 인쇄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 가게 주인은 “모짜렐라 치즈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으면 맛과 향기가 금방 사라진다.”면서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불만이 지금 EU 전역에 감돌고 있다. 이제 EU는 너무 거대해져서 개별 국가의 고유성을 무시할 정도가 되었다. 4억 5천만 명의 인구와 25개국이 가입한 EU는 ‘공룡’으로 변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50여 년간 이룩해 온 유럽 통합의 ‘위대한 행로’가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EU 헌법안에 대한 비판
지난 5월 29일 EU 헌법안은 프랑스 국민투표에서 55 : 45로 부결됐다. 그로부터 3일 뒤에는 네덜란드에서 62 : 38로 거부됐다. 이들 두 나라는 EU가 창립되었던 1952년부터 회원 국가였다. 이날 투표장에 들어간 네덜란드 사람 중에서 EU 헌법안을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너무 앞서가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표시했다. 이들이 EU 헌법안을 거부하는 이유는 한결같다. “우리는 EU가 유럽 국가들 사이의 연합체가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웃 나라를 쉽게 여행하고, 공동 화폐도 사용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정도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 EU의 헌법안은 ‘단일화된 유럽’을 꿈꾸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개별 국가의 관습이나 문화는 사라질 것이고, 획일화된 생활 양식이 등장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심지어 프랑스의 반대론자들은 “지금 EU는 앵글로-색슨적인 경제 체제를 회원 국가들에게 부과시키고 있다.… 그것은 안정된 직업과 넉넉한 사회 안전망을 가진 복지 국가 프랑스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라고 단언할 정도다. EU 헌법안에 대한 반감 속에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EU 헌법은 회교도 소수파를 늘어나게 할 텐데 거기다 인구 7천만의 터키까지 가입하게 되면 사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EU 헌법안의 비준 일정
EU 헌법안은 2006년 11월 1월까지 회원국의 비준을 받게 되어 있다. 지금까지 비준한 국가는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스, 헝가리, 이탈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스페인 등이며, 비준 방식은 국민투표나 의회 가결로 되어 있다. 앞으로 남은 비준 예정 일정을 보면 룩셈부르크가 7월 10일, 덴마크 9월 27일,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은 2005년 후반기, 영국과 체코 공화국은 2006년 6월 이전이며, 폴란드는 아직까지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들 국가 중 가장 큰 관심이 모아지는 곳은 영국이다. 영국은 2006년 봄까지 EU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지만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부결로 이 계획을 재검토하고 있다. 영국의 EU 헌법안 반대론자들은 그것은 영국의 주권도 침해할 것이고, 유럽 대륙에 초강대국을 등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야당인 보수당은 EU 헌법안을 새로 마련해서 개별 민족국가의 연합체가 되게 하자고 주장하지만 여당인 노동당은 단지 소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을 뿐이다.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39%, 반대 39%, 미결정 22%로 보도되고 있다. 만일 영국에서 EU 헌법안이 부결된다면 토니 블레어 수상은 사임이 불가피할 것이다.
남은 과제는
EU 지도자들은 6월 16-17일에 브뤼셀에서 회합을 갖기로 했다. 이 모임에서 계속 비준을 추진할 것인지, 연기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의결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EU 헌법안에 따르면, ‘2년 내 회원국 중 20개국이 비준하게 되면 …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유럽 의회로 넘긴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새 헌법안을 만들기로 의견이 모아진다면 그것을 위한 협상에 또 다시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의 좌우파가 EU 헌법안에 대해 묘하게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는 “EU라는 초자유시장적 경제 체제의 등장”을 우려하고, 우파는 “EU라는 초강대국의 등장으로 개별 국가의 주권이 양도될 것”을 걱정한다. 좌우 양편의 공세에 놓여 있는 EU의 헌법안은 결국 “새로운 주권 체제의 유럽을 창설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국가 연합 체제의 유럽을 형성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하는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지금 EU는 민족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 우리 시대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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