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특수기관 일부에 망동(妄動)주의자가 영웅주의로 달려 이런 것을 행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사과하고 싶다."
통이 크고도 놀라운 사과였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 김일성 주석 시대에 저질러진 국가 범죄를 그렇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의 대담한 접근과 고이즈미의 튀는 스타일이 마침내 북.일 간에 국교정상화까지 시야에 둔 관계개선의 스파크를 일으키는가 싶었다. 그리고 북.일관계 개선으로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한달 뒤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방식의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북한의 코앞에 들이밀어 제2의 북핵 위기가 일어나고 북.일 화해무드는 찬물을 뒤집어썼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농축우라늄 관련 증거를 급물살을 탄다 싶은 남북관계와 북.일관계 개선을 견제하기 위해 공개했다는 의혹을 샀다. 그때는 남북 간에도 개성공단과 철로.육로 연결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였다.
그래도 북.일관계는 김.고이즈미의 두번째 정상회담이 열리고, 일본인 납치자들이 고이즈미와 함께 귀국하고, 그 뒤 북한에 남은 납치자 가족들마저 귀국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북.일관계가 치명적인 지뢰를 밟아버렸다. 북한이 일본에 보낸 일본인 납치자의 유골이 가짜로 드러난 것이다. 일본 열도가 분기탱천하여 들썩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북.일관계가 국교정상화까지 발전하여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100억달러 안팎의 배상금을 받고 두 나라의 경제협력이 궤도에 오른다면 그것은 북한사회의 개방과 경제의 국제화에 큰 전환점이 될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사정은 그런 희망과는 반대방향으로 흐른다. 정부는 경제제재를 검토하고 의회는 북한인권법을 만들려고 한다. 일본 의회는 한 술 더 떠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해 미국 의회와 공조까지 모색할 태세다.
일본이여, 일본인들이여, 좀 냉정하라. 신중하라. 가짜유골을 보낸 것은 유전자 검사에 무지한 사람들의 소행일 가능성,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김 위원장이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는가. 일본 정부가 반북여론에 떠밀려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만들면 6자회담의 성과는 고사하고 회담이 다시 열리는 것조차 불투명해질 것이다. 일본 정계와 보수언론은 북한 제재는 신중하게 하라는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 핵문제 해결이 급한데 다른 문제로 6자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 문제해결은 제재나 봉쇄보다는 대화를 통해 하라는 반기문 한국 외교부 장관의 충고를 외면하지 말라.
특히 북한인권법 제정은 북.일관계뿐 아니라 6자회담의 구도를 무너뜨려 동북아시아에 최악의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인권이 무엇인가. 거창하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권리지만 현실적으로는 병들면 치료받고, 웰빙까지는 몰라도 먹을 만큼 먹을 권리 따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미국이 이미 인권법을 발동하고 있는데 일본까지 덩달아 그런 법을 만들어 북한을 압박하면 북한 사람들의 인권이 개선될 것인가. 그들의 생활은 더 고달파질 것이다.
그리고 북한 강경파들의 기세만 등등할 것이다. 북한의 인권은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 전체의 해결의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장기적으로 개선할 성질의 것이다. 인권을 개선하라고 북한을 압박할수록 원초적 인권인 북한 백성들의 생존권은 후퇴한다는 패러독스를 잊어서는 안 된다.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일본 여론은 고이즈미의 북한 제재 신중론도 지지하고 경제제재론도 지지한다. 일본의 대북 딜레마의 반영이다. 일본은 납치자 문제를 동북아 평화의 큰 시야로 보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