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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정진홍   |  2005-11-09 04:59:19  |  조회 2375 인쇄하기
요전에 볼일이 있어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에서 3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하더군요. 얼마나 빠른지요.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반세기 전입니다. 그 때 군용열차를 타고 서울에 가려면 대체로 12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이후 여러 번 그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부산에 다녀온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그렇게 ‘빠름’을 느껴보기는 처음입니다. 부산이 아주 ‘먼 곳’이었는데,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 젊음을 보낸 그 시절이 아주 ‘먼 시각(時刻)’이었는데, 그 거리와 시각의 아득함이 갑작스러운 빠름에 실려 그 ‘넓디넓은 간격’을 지우면서 바짝 다가오는 느낌조차 들었습니다. 거리가 좁혀지면 기억의 시점(時點)도 그렇게 가까워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옛날이 저리게 그리웠습니다. 그 시절이 어제처럼 뚜렷했습니다. 서둘러 일을 끝내고 다음날 오후 차표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짬을 내어 여기저기 둘러보았습니다. 광안리로 해서 수영으로, 다시 태종대를 들르고 영도로 나아갔습니다. 광복동을 거쳐 부산역에 도착하기까지 참 많은 곳을 다녀왔습니다. 옛날 모습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 곳도 낯설기만 했습니다. 아마 눈을 가리고 털썩 그 자리에 떨어졌더라면 눈을 뜨고 발견한 곳들은 한결같이 낯선, 그러나 어딘지 눈에 익은, 그러한 곳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렇게 달라졌는지요.

하지만 저는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곳곳에서 저는 예상하지 않았던 얼굴들을 만났습니다. 까맣게 잊었던 얼굴들이었는데 바로 거기에 들어서자 ‘먼 시간’을 건너뛰고 어제처럼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을 축적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전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얼굴들이 그 곳곳에서 이름마저 선명하게 지니고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해리’가 그렇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해리라는 것을 안 것은 제가 선배 따라 그녀가 하던 작은 밥집에 갔었을 때니까 부산생활을 막 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밥집에 간 것은 서너 번 정도였다고 기억됩니다. 영도에서 태종대로 가는 어느 길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참 허름했습니다. 어둠 컴컴한 부엌 구석 바닥에 항아리를 묻어놓고 거기에 먹을 물을 담아 놓았었는데 거기서 냉수를 사발에 떠 주었던 것이 그녀를 만난 처음이었습니다. 무엇을 먹었는지, 몇 명의 동료들이 함께 갔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 마흔도 더 됐을 그녀의 이름이 해리라는 사실이 제게는 사뭇 뜻밖이었습니다. 무척 이국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그녀를 해리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인상이 이국적이라는 생각마저 들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제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 이름일까? ‘양공주’ 출신일지도 몰라, 아냐, 외국생활을 했었는지도 몰라, 아마 젊었을 적에는 아름다웠을 거야, 사랑하고 또 실연하고 그랬겠지, 지금 가족들이 있을까? 어쩌면 혼자 살지도 몰라, 자기 이름? 그래 그럴 거야......

그녀가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살아가는 ‘부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두 번째 그 밥집을 가기 전이었습니다. 부대에서 꽤 멀었기 때문에 일부러 가지 않으면 거기까지 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아 그 집을 찾을 잦은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선배 제대 회식을 후배들이 거기에서 하기로 큰마음을 먹고 돈을 추렴하여 주말에 그 밥집으로 갔습니다. 그 때 저는 해리 아줌마에게 해리라는 이름을 영어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양공주’출신이리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해리 아줌마는 거친 경상도 사투리로 ‘영어라니?’하고 말하면서 놀랍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는 당황해 하는 저에게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한자로 ‘海里’라고 써주었습니다.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편을 바다에서 잃었고, 자식도 병들어 죽어 바다에 버렸다. 그러니 나도 죽으면 바다로 가야하지 않겠나? 그러니 내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제는 바닷길 따라 일생 살다 그 바닷길 따라 가는 거지..... ‘해리’, 그것은 내게 바닷길이란 말이다. 내가 바닷길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해로(海路)’라고 해야지, 해리(海里)는 바다의 거리를 재는 단위이지 않으냐고 하는 항변을 저는 분명히 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해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빈 종이에 낙서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김하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새로운 ‘빠름’이 그것을 되생각하게 해준 것도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저도 ‘내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하는 것을 되새김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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