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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노릇하기 참으로 어려워라-매천 황현 선생의 경우
신봉승   |  2005-11-09 05:07:29  |  조회 3068 인쇄하기
역사 드라마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무렵 특정 시대의 사료를 찾아 헤매던 때의 어려움은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해 지곤 한다. 인터넷도 없었고, 단행본의 발행도 성하지 않았던 때라 정말로 황야를 헤매 듯 막막할 때가 있었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로 접어들던 격동의 시기인 이른바 구한말의 시대사항과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방송국의 부탁을 받고 어렵게 손에 넣게 된 것이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그때 나는 사료로서의 ‘매천야록’ 보다 저자 황현의 참 선비 된 도리에 머리를 숙이게 되면서 그분의 삶에 매료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내 삶의 형편없음을 뒤돌아보는 계기를 삼곤 하였다.

매천 황현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 서석촌에서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한 살에 아름답고 수준 높은 한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더니,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모두 암송할 정도의 천재성을 발휘하게 되면서 점차 주변을 에워싼 시골의 학문과 스승들의 진부함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19세가 된 매천 황현은 혈혈단신 상경하여 당대의 논객들을 찾아다니면서 시와 역사인식에 대한 토론을 청한다. 시골뜨기 행색에 사팔뜨기 눈을 한 매천 황현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격조 높은 시와 도도할 역사인식은 당대 지식인들을 감동하게 하고 남았다.

1883년(고종 20),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드리면서 특별히 시행되는 보거과保擧科에 합격을 하였으나, 나날이 어지러워지는 나라꼴을 한탄하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때로는 울분으로, 때로는 춘추의 필봉으로 적어나간다. 역저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록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신문도 라디오도 없었고, 인터넷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대에 전라도 구례에 앉아서 어찌 그리도 소상하게 역사와 우국충절들의 삶을 엮어낼 수 있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1906년, 왜국 땅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부산포로 돌아와 그곳 상무사商務社(요즘의 상공회의소)에 안치된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유해가 안치된 상무사의 주위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와 함께 살아있기에 천하동생天下同生이요, 그의 죽음은 세상이 모두 죽은 것이기에 天下同死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유해가 모셔진 빈소에 행색이 꾀죄죄한 사팔뜨기 시골 선비 한 사람이 들어와서 만사輓詞 6수를 영전에 올리고 통곡을 쏟아놓는다. 그의 행색이 너무도 초라했던 탓에 누구도 이 시골 선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그가 놓고 간 만사는 절창 중의 절창이었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매천 황현임을 알고 급히 찾아보았으나 이미 떠난 다음이었다.

‘곡면암선생哭勉菴先生’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항로께 배움 받은 꽃다운 나이로 애타는 백성 구하고자 상소를 올렸지. 선비거나 재상이거나 이제는 모두 끝이구려. 천년만년 길이길이 공론만 남았소. 속 썩은 귀양살이 이역이라 만리 밖 빨간 신 신고 오신다기에 삼년을 손꼽으며 기다렸는데 소식조차 뜸했던 그 사이 바다건너 하늘 끝 큰 별 떨어졌다는 기별이니 초혼한다 하여 높은 곳 올라 바라 볼 생각마소. 푸르른 대마도 보기조차 싫지 않소.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를 뿐,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

이 만사는 조선시대의 만사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되는 명문이지만 마지막 대목은 정말로 곱씹어 볼만 하다.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를 뿐故國有山虛影碧,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可憐埋骨向何方’에 담겨진 절절함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고국산천 삼천리강토가 왜놈들의 땅이 되었는데 시신이 돌아온들 묻힐 곳이 있겠느냐는 절규는 읽는 사람들을 애타게 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910년 8월에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제 합병庚戌國恥한다. 소식에 접함 매천 황현은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결심한다. 그는 절명시絶命詩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짐승들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역사를 생각하니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네.

매천 황현은 스스로 자진하기로 결심하고 아편 세 덩어리를 꺼내 놓는다. 그러나 좀처럼 결행하기가 어렵다. 그는 아우黃瑗에게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기까지 한다.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뗐다 주저하기를 세 차례나 했다. 선비로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구나.”

매천 황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가족들에게 남긴 ‘유자제서遺子弟書’는 오늘을 사는 지식인들에게 너무도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내게는 꼭 죽어야 할 의리義理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백 년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고도 남는다. 내가 위로는 하늘의 지시하는 아름다운 도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책 속의 말씀이 어긋나지 않았다. 이제 깊이 잠들려 하니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 때 매천 황현의 연치 쉰다섯, 더 살아서 그 빛나는 문필로 후학들에게 신천지를 열어 줄 수도 있지를 않았겠는가.

나는 이 글을 자주 읽는다. 읽을 때마다 내가 하는 일들이 한심하고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끓어 오를 뿐이다. 이미 칠십을 넘긴 처지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도 심히 부끄러운 노릇이 아니랴.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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