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사법부 수장으로 신임 이용훈 대법원장이 오늘 취임한다. 국민과 더불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사법부의 확고한 위상을 이 땅에 정착시킨 대법원장이 되어 달라는 소망을 담아 몇 가지 당부를 드리고자 한다.
이 원장이 당장 해야 할 핵심과제는 사법개혁이다. 그러나 사법개혁을 정치.행정 등 다른 분야의 개혁과 같은 차원으로 다뤄선 안 된다. 다른 분야의 개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의 유권적 해석.적용, 즉 법치주의의 실현을 그 책무로 한다. 헌법과 법률은 이미 제도화된 국민적 합의이고, 그 내용은 합의된 국익이다. 따라서 헌법과 법률의 올바른 해석.적용이야말로 합의된 국민의 뜻에 따른 법 운영이며 국민을 위한 사법운영이다. 사법부는 헌법질서의 수호가 그 본래의 책무이므로 법관에게 시류에 부합하는 판결을 요구해서는 안 되며, 또 여론에 배치되는 판결을 한다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 법관은 국민의 뜻을 다만 법률과 헌법에서 찾을 따름이다.
따라서 사법개혁의 초점은 바로 사법부가 법치주의의 보루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맞추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법부의 독립된 지위와 권한이 더욱 확고해지고, 사법부가 짊어지고 있는 법치주의 실현의 책무를 다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여건을 조성.강화하는 것이 사법개혁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법부 독립은 우선 외부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법원장은 자신을 지명한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력은 물론, 경제권력과 사회세력으로부터 법원을 지켜내는 버거운 책무를 잘 감당해 내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대법원장이 바로 이 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사법부 전체가 제 구실을 못한 것처럼 비난을 받았다.
법원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선 내부 개혁도 반드시 필요하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사법행정조직은 필연적으로 법관의 관료화를 낳았다. 특히 법관 승진제도가 수직적 행정조직하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 법관의 법원 내부로부터의 완전 독립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 점을 신임 대법원장은 임기 내에 제도개선과 운영의 묘를 통하여 해결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법관으로서 문제가 되는 가치관이나 처신.자세 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솎아내야 한다. 다만 그동안 법관을 천직으로 여기고 가난과 고독을 이겨내며 묵묵히 법치주의의 파수꾼으로 사법부를 지켜온 많은 하급법원 판사에겐 격려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유신시절, 소장법관이었던 이 대법원장은 울분을 토하면서 사법부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그 초심을 임기 내내 간직하기 바란다.
법치주의와 관련된 사법부의 반성은, 법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법적 안정성과 예견 가능성을 과연 제대로 사수하고 실행해 왔느냐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된다.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법적 안정성이 재판에서조차 보장이 안 된다면, 법치주의의 정착은 불가능하다.
법원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법적용의 공평성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극소수의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적인 연(緣)과 정(情)에 판결이 흔들린다면 신뢰는 한꺼번에 무너진다. 법관들의 진정한 의지와 용기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이 대법원장이 독립된 사법부의 위상을 확립하고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면 우리나라의 격은 한 단계 올라설 것이다. 이 원장이 미국의 존 마셜이나 얼 워런, 일본의 고시마(小島良一) 같은 반열의 위대한 법관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 이들은 모두 자기를 사법부의 수장으로 만들어준 최고권력자의 입장을 떠나 오로지 사법부 수장의 입장에서 국가의 장래와 국익을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중앙일보에서.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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