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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순 할머니의 가슴 저미는 일기장
신봉승   |  2005-11-23 05:13:10  |  조회 2603 인쇄하기
-내 나이 아흔, 세상 떠날 날이 머지 않았지…

올해 아흔인 홍영녀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쓴다.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일흔이 돼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 ‘까막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홍 할머니. 삐뚤빼뚤 서툰 글씨에 맞춤법조차 엉망이지만 20여 년 동안 써 온 그의 일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세상과 이별할 날이 머지않은 그의 일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이 내 마음 누가 달래주나

"그 누가 이내 마음을 달래 주나
청개구리는 무슨 사연으로
저다지 슬픈소리로
슬픈소…"


-나는 쓸쓸 해, 가슴이 서러워…

"오늘도 흰 머리카락 날리면서
산 마을로 너머 가시는 햇님은
어김없이 너머 가시네.
햇님 나는 나는 쓸쓸해.
가슴이 허전해.
가슴이 서러워.…"


-인생은 바다위에 떠 있는 배가 아닐까

"흘러 흘러 저 배는 어디로 가는 배냐.
앞쪽으로 타는 사람은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뒤쪽으로 타는 사람은 그 누구를 기다리네."


-아직 어두운데…, 햇님이 나오셨나?

햇살이 고개를 들면 그는 창가로 다가가 햇님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한 시골마을에서 300여 평 남짓한 텃밭에 무, 배추, 호박, 가지, 고추 등 갖가지 농사를 지으며 사는 홍 할머니. 밭일을 하는 동안 그는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다. 자식 같은 농작물을 매만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는 밤 시간이 가장 길고 무료하다. 잘 들리지 않아도 TV를 켜 놓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슬하에 6남매를 둔 홍 할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가 ‘혼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자식들이 걱정하면 그는 “그렇게 죽는 게 복”이라고 대답하며 혼자이기를 고집한다.


-헌 내복을 입고 밭일하는 홍 할머니

홍 할머니는 ‘새 내복’ 보다 낡디 낡은 헌 내복을 더 좋아한다. 아들, 딸, 조카들이 사다 준 새 것을 마다하고 헌 내복을 입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다 버리려고 했던 내복을 또 빨아 입었다. 낡은 내복을 입는다고 딸들은 야단이다. 새 내복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딸들이 사다 준 내복, 조카들이 사 온 내복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쌓여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 자꾸 새 것 입어 휘질러 놓으면 뭐하나 해서다.

그리고 새 옷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헌 옷을 입어도 뿌듯하다. 나 죽은 후에 다른 없는 이들 입게 주면 얼마나 좋으랴 싶다. 그런 에미 맘을 모르고 딸년들은 낡은 옷을 버리라고 야단이다."


-물끄러미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홍 할머니

추수가 끝나면 홍 할머니는 ‘씨앗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는다. 몇 년째 이 일을 반복하는 그는 혹여 내년에 자신이 심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식들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손수 지은 농작물을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홍 할머니가 1994년 8월 18일에 쓴 일기 전문이다.

"내 글은 남들이 읽으려면 말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식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내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꽉 찼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글씨 한 자 한 자를 꿰맞춰 쓰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그때마다 자식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글 모르는 게 한 평생 끌고 온 내 한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글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쓰는 것은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자식들이나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그래서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성이 한테 숫자 쓰는 걸 배웠다. 밤늦도록 공책에 1,2,3,4를 100까지 썼다. 내 힘으로 딸네 집 전화를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며 메모도 가끔 한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어라 웃어댄다. 멸치는 ‘메룻찌’로, 고등어는 ‘고동아’로, 오만원은 ‘오마넌’으로 적기 때문이다. 한번은 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 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딸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며 웃는다. 그러나 딸들이 웃는 것은 이 에미를 흉보는 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구석 저 구석 써놓은 글들을 숨겨 놓는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이젠 손주들이 보는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나마 쓰게 되니까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적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자식을 낳으면 굶더라도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 (참고: 맞춤법이 틀린 일기를 고쳐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홍 할머니가 닦고 또 닦았던 고무신…

딱히 외출할 계획도 없는데 설레는 마음으로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말린 홍 할머니. 하지만 갈 곳이 없어 고무신에 다시 먼지가 쌓이고 그는 신어 보지도 않은 채 더러워진 고무신을 또 닦아 햇볕에 내 놓는다. 그는 이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뽀얗게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내놓았다.
어디 가게 되지 않으니 신어 보지도 않고 다시 닦게 된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



-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에 눈물짓는 홍 할머니…

어린 자식이 숨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이 담긴 그의 일기는 그만의 일기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꾸역꾸역 참고 살아온 한 여인의 일기요, 우리네 어머니의 일기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기다. 홍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 가을의 뜨락’이라는 제목으로 11월 21일부터 25일까지 KBS 2TV ‘인간극장’을 통해 방송된다.

기사제공= 흥국생명 세상엿보기 / 김순희 기자


홍영녀 할머니의 ‘무남이 이야기’


“무남이는 에미가 미련해서 죽였어”
“자식 죽으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겨”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더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어. 우리 무남이 죽은 지 60년이 넘었어. 내 나이 아흔 줄에 접어들었는데도 무남이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무남이는 생으로 죽였어. 에미가 미련해서 죽였어. 무남이가 태어난 지 일곱 달 되었을 때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지. 그때 서울 돈암동 살던 남동생 순일이가 장사 치르는 데 무남이 데리고 가면 병난다고 두고 가라고 했어. 우유 끓여 먹인다고. 그 비싼 우유까지 사 가지고 와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린 무남이가 에미를 찾을까 봐 그냥 업고 왔어. 순일이가 “경황이 없어 젖 먹일 시간이나 있겠냐”며 우유를 내 가방에 넣어 줬어.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상제 노릇하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어. 무남이는 동네 애들이 하루종일 업고 다녔지. 애가 순해서 잘 울지도 않았어. 어쩌다 에미와 눈이 마주치면 에미한테 오겠다고 두 팔을 벌리곤 했지. 젖이 퉁퉁 불었는데도 먹일 시간이 없었어. 그런데 무남이가 우니까 애들이 우유를 찬물에 타서 먹인 게야. 그게 탈이 났나 봐. 똥질을 계속 해 댔어.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직후 시어머님이 앓아 누우셨어. 무남이가 아파도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없었지. 상중이라 병원 가는 게 흉이었거든. 약만 사다 먹였지. 그런데 시어머님이 한 달 만에 시아버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나셨어. 초상을 두 번 치르는 동안 무남이의 설사는 이질로 변했어. 애가 바짝 마르고 눈만 휑했지. 두 달을 앓았으니 왜 안 그렇겠어. 그제서야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늦었다고 했어.


그땐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주인집 여자가 자기 집에서 애가 죽는 것 싫다고 해서 날이 밝으면 무남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곤 했어. 하염없이 밭두렁을 걸어다니면 등에서 ‘가르릉 가르릉’ 가느다란 소리가 났어. 그러다 그 소리가 멈추면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애를 돌려 안고 “무남아!”하고 부르면 힘겹게 눈을 뜨곤 했지. 옥수수밭 그늘에 애를 뉘어 놓고 죽기를 기다렸어.


집 밖으로 떠돈 지 사흘째 되던 날. 가엽디 가여운 무남이를 풀밭에 뉘어 놓고 “무남아!”하고 부르니까 글쎄 그 어린 것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어. 그날 저녁을 못 넘길 것 같아서 내가 시집 올 때 해 온 깨끼 치마를 뜯었어. 그걸로 무남이 수의를 짓는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바늘귀를 꿸 수가 없었어.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서투른 솜씨로 옷을 다 지었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무남이에게 수의로 갈아입혔어. 그런데 수의가 너무 커서 무남이의 어깨가 훤히 드러나고 얇은 천이라서 그런지 속살이 다 비치지 뭐야. 수의 입은 무남이를 꼭 안고 있는데 첫 닭 울 때 숨이 넘어갔어. 소나기처럼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무남이를 넋 놓고 쳐다봤어. 속눈썹은 기다랗고, 보드라운 머리칼은 나슬나슬하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가진 우리 무남이….


나는 이 얘기를 할 적마다 울지 않고는 못 배겨. 게다가 그땐 이 에미가 얼마나 독하고 야박스러웠는지 몰라. 무남이 싸 안았던 포근한 융포대기나 그냥 둘걸. 물자가 너무 귀한 때라 융포대기 대신 헌 치마에 깃털같이 가벼워진 무남이를 감쌌어.


즈이 아버지가 주인 여자 깨기 전에 갖다 묻는다고 깜깜한데 무남이를 안고 나갔어. “어디다 묻었냐”고 물었더니 뒷산에 있는 상여집 근처에 묻었대. 그땐 왜정 때라 나도 부역을 나가게 됐어. 그런데 하필이면 일하러 간 곳이 뒷산이었어. 상여집 뒤에 새로 생긴듯한 작은 돌무덤이 봉긋하게 솟아있지 뭐야. 그걸 보고 난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어. 무남이 이름을 부르짖다 정신을 잃었지.


암만 생각해도 무남이는 생으로 죽였어. 제때 병원에만 갔어도 살았을 거야. 순일이 말만 들었어도…. 그 생각을 하면 내 한이 하늘에까지 뻗치는 것 같아. 죽으려고 그랬는지 그 녀석을 업고 나가면 다들 잘 생겼다고 했지. 순하긴 또 왜 그렇게 순했는지 몰라.


태어난 지 아홉 달 만에 죽은 우리 무남이. 찬바람 부는 이 즈음이 되면 깨끼옷 입은 무남이가 추울 것 같아서 가슴이 저리다 못해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아.


아, 가여운 내 새끼야. 이 에미를 용서해 다오.



‘내 아들 무남아’


아가야 가여운 내 아가야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에

아가야 불쌍한 내 아가야




열 손가락에 불붙여 하늘 향해 빌어 볼까

심장에서 흐른 피로 만리 장서 써 볼까

빌어 본들 무엇하리 울어 본들 무엇하리




아가야 아가야

불쌍한 내 아가야

피어나는 국화꽃이 바람에 줄기 채 쓰러졌다고 울지 말아라.




겨우내 밟혀 죽어 있던 풀줄기에서

봄비에 돋아나는 파란 새싹을 보지 않았니.

돌쩌귀에 눌려 숨도 못 쉬던 씨 한 알이

그 돌을 뚫고 자라 나온 것도 보았지.




뿌리가 있을 동안은 울 까닭이 없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울 까닭이 없다.




밝은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 눈물을 씻고

뜰 앞에 서 있는 꽃줄기를 보아라.

햇빛에 빛나는 꽃잎을 보아라.




아가야, 눈물을 씻어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웃어 보아라.

쥐암 쥐암 손짓 재롱을 부려 보아라

옹알 옹알 옹알이로 조잘대 보아라.

예쁜 나의 아가야.




우리 아기 피리를 불어주마

우리 아기 우지 마라

네가 울면 저녁별이 숨는다.




*** ‘내 아들 무남아’는 홍영녀 할머니가 직접 쓴 글입니다. ‘강화도’가 고향인 홍 할머니는 여덟 살 되던 해 ‘모시’를 짜기 시작해 열여덟에 개성으로 시집가면서 베틀에서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무남이를 낳은 것은 스물 여섯. 홍할머니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에서 농사짓고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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