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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국 소설 강의 첫 시간에 자주 ‘춘향전’의 시대 배경이 언제인 줄 아느냐고 학생들에게 묻곤 한다. ‘춘향전’을 영화로만 보지 않고 책으로 읽은 학생들도 ‘춘향전’의 서두가 ‘숙종대왕 즉위 초에…’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별로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고대 소설과 근대적 의미에서의 소설의 차이점이라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곤 한다.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란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시대적·문화적 토양 속에서 삶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고대 소설은 ‘춘향전’의 경우에서 보듯 조선조의 어느 시대가 배경이어도 상관없는 어떤 원형적인 이야기의 서술이라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춘향전’이 숙종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에도 강한 필연성이 있다.
조선 왕조의 500년을 통틀어 ‘춘향전’ 같은 로맨스의 배경이 될 만한 시대는 별로 없지 않았나 싶다. 건국 초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치열했고 세종조에 와서 안정됐지만 국가의 기틀을 정립하느라 엄숙하고 긴장된 시대였을 것이다. 곧 세조의 왕위 찬탈이 일어나 나라가 몸살을 앓았고 다음에는 연산군의 폭정, 그리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정권 다툼과 사화가 거듭됐고 급기야 준비 없이 임란(壬亂)을 맞아 전국이 초토화됐다.
임란에서 회복할 사이도 없이 맞은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겪었고 80만 백성이 청나라에 붙잡혀 갔다. 이후 나라 살림은 피폐했고 조정은 북벌론으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숙종조에 와서야 북벌론이 진정되고 현실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숙종은 성격은 불같이 급하고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조선조에서 가장 요란한 로맨스의 주인공이었다. 중인 계급 출신의 장희빈을 중전으로 승격시킨 숙종조는 그러므로 춘향이 정절을 지킨 댓가로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 공간이었을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동화 같은 로맨스도 역사적인 배경과 어울려야 신빙성을 얻는 것이다. 역사의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성격이 있다. 이 성격은 이전 시대의 유산, 주변 상황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의 이념과 의식의 변천에 의해 형성된다. 어느 시대에건 사람들은 그 시대 상황, 시대 정신과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한 시대에는 ‘죽을 죄’였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영웅적 행위가 될 수도 있고, 한 시대에는 치명적인 중병이 다른 시대에는 경미한 질환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역사의 연대를 잘 못 외웠다. 역사의 연대를 그냥 무의미한 숫자로 ‘빡빡’ 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관심 분야의 역사적 사건은 연대를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입력이 된다. 어느 역사적 사건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건이 17세기적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18세기적 상황에서 일어났는지, 신고전주의적인 사조를 배경으로 일어났는지, 그에 대한 반동의 일환인지 등을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그 사건은 어떤 사상을 가진 어떤 인물들에 의해 발생했고 그다음에 일어난 어떤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므로 역사 속의 좌표는 저절로 찍히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사람의 삶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어떤 사건이건 반드시 원인이 있고 파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질 때 공적인 영역의 어떠한 행동도 경박하고 무모하게 할 수 없고, 어떤 현상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없게 된다.
역사적 안목은 사람을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 역사적 안목은 또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사고 습관을 길러 준다. 역사를 배워서 우리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 삶의 방향타를 올바로 잡자.<고려대 교수,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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