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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었다
이수근   |  2005-12-30 01:46:10  |  조회 2558 인쇄하기
해방 전후 세대는 대체로 두개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난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습니다. 그 세대는 그 위대한 꿈을 성취했습니다. 그 세대는 정말 행복하고 자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시대를 살면서 꿈꾸고 겪었던 저의 쓰라린, 그러나 어찌 보면 너무나 웃기는 체험 몇 토막을 풀어보겠습니다.

6·25 사변이 훑고 간 1950년대의 황량함과 삭막함, 그리고 가난은 정말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먹을 것이 없었던 을씨년스럽던 시대였습니다. 시골에서 자랐던 저는 꽁보리밥이나 시래기죽, 산나물로 허기를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비지는 참 좋은 먹거리 였습니다. 참기름을 짜고 난 다음 나오는 깻묵도 먹었으니까요. 허기를 때우려고 술도가에서 술찌끼를 얻어다가 먹고 벌겋게 취해 나자빠진 어린이가 저 뿐은 아니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즈음에도 보리와 쌀의 비율이 7대3으로 된 밥상을 받는 정도였습니다. 어쩌다가 제삿날 이밥을 먹어보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굶는 끼니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웬만한 사람들의 일상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밥을 먹고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그 시절 우리들의 자연스런, 그리고 정말 절실한 꿈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춥기는 왜 또 그렇게 추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옵니다. 배가 고프니까 추위도 더 탓을 것입니다. 살을 엔다는 말, 보통 사람쯤만 돼도 요즘은 전혀 실감을 못할 것입니다. 해방 전후 세대는 귀때기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살을 에는 혹한을 견뎌내고 자라났습니다. 변변한 내복이나 양말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습니다. 깁고 때운 자국이 덕지덕지 난 고무신에 헤진 무명 양말을 신은 소년 소녀들은 강풍에 뒤뚱거리며 십리 길의 학교를 뛰어다녔습니다. 교실의 장작 난로는 구세주였습니다. 점심 때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가루 죽은 정말 죽여주는 성찬이었습니다. 미국원조품이었습니다. 역시 미국원조품인 분유를 따끈한 물에 개어준 우유도 아이들의 인기품목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마시기만 하면 설사가 나서 우유마시기는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유를 마시지 않습니다. 기름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항체가 제 몸에 형성된 것이었다고나 할까요.

유년에서 성장기에 이르기 까지 채식 위주의 상차림에 익숙했던 저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것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매우 성가신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밥을 먹는 꿈이 실현되자 저는 엉뚱한 복병을 만난 것입니다. 고기와 생선을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절이나 제삿날 정도 구경할 수 있었던 고기나 생선을 저는 어린 시절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고기 밥상을 대하기라도 하면 비린내로 말미암아 구역질이 나서 그것을 입에 댈 수가 없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는다는 말을 저는 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동료들로부터 식성이 참 까다롭다는 핀잔을 듣고, 또 구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하나 때문에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먹을 수 없는 사태가 종종 벌어졌습니다. 물론 저는 괘념치 말고 그것을 주문하라고 말을 해도 동료들은 하여튼 “돼지고기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나”라는 등 저를 한두 번쯤은 꼭 걸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듯 타박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자장면도 저는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자 동료와 상사들 중엔 저에게 육식을 강권하는 이들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식사 때나 회식 때면 저는 여간 곤욕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정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기엔 당시 저의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더 들고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이후 동료나 상사, 후배들에게 제가 왜 육식이나 생선을 기피했을 수밖에 없었던가를 고백하면 그것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드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비위가 약한 사람의 특수하고 극단적인 사례였기 때문이라고 이해는 합니다만 매우 씁쓰레한 소회는 감출 수가 없습니다. 경제사정이 국가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나아짐에 따라 저의 식성도 많이 진화했습니다. 아직도 이것도, 저것도 못먹는다는 비아냥을 듣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밀가루 음식과 보리밥 얘기를 더해야겠습니다. 남들은 건강식이라 하면서 좋아하는 현미밥이나 잡곡밥, 보리밥을 저는 지금도 싫어합니다. 아내는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저는 보리밥을 너무 많이 먹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가 대기근을 겪었을 때 밀가루가 배급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밀가루 음식을 하도 많이 먹어 그 후 10여년 이상 국수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어쩌다가 제가 이런 얘기를 꺼내면 우리 연배에선 동감을 표하는 이가 더러 있어 위안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저는 외국여행을 하면 여간 곤욕을 치르지 않습니다. 혼자 여행할 때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음식의 종류가 제한되긴 하지만 제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취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럿이 같이 하는 여행이나 가족과 같이 하는 여행은 피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워낙 특수한 식성이니까 저를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하면 되는 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또 무엇이든지 같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런 나머지 굳이 저를 (식사하는 데까지) 같은 동아리에 엮으려고 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한번 타박을 받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가족들은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점에서도 이것저것 즐겁게 식사하면서 빵 종류를 뜯는 저를 매우 가엽다는 듯이 대합니다. 편식하면 되겠느냐고 저를 몰아세우는 데도 지쳤기 때문이지요.

개인적으로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그런 냉대와 수모를 당하면서도 저는 행복합니다. 유년의 꿈 두 가지, 즉 가난으로부터의 해방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우리 세대에서 이루었고, 저도 그런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위대한 기적의 성취는 우리 선배 세대에게 더 많은 공을 돌려야할 것입니다. 선배 세대들이 나라의 진로를 확고하게 잡고 국가를 이끌고 있었을 때 우리 세대는 돌격대의 일원으로 국가건설에 참여했습니다. 저희 세대는 정말이지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뛰었습니다. 가난을 대물림해서는 안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우리 세대의 이심전심의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일이 없어서 불평했을지언정 일이 많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고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누구를 탓해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의 꿈의 성취를 위해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신물이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면 다른 신천지가 우리 눈앞에 전개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 이후의 역사가 증언하는 바와 같습니다.

<현역 기자 생활을 접은 지난 2년 동안 저는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우리 포럼의 홈페이지 개설에 따라 저의 체험적 편린을 통해 제가 살았던 한 시대의 어떤 모습을 조금이라도 조명해 보려고 감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경륜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우리 포럼의 선배분들에게 저의 국소적이고 마뜩치 않은 일상사를 풀어드린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다만 정진홍 대표께서 우리 포럼 출사표에서 강조하신 '증언'의 책무를 조금이라도 이행해야겠다는 차원에서, 그리고 저의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차분하게 얘기해 주어야했던 것을 현실의 중압감과 게으름 등을 핑계로 해서 미처 하지 못했던 아버지 세대의 이런저런 일을 늦게나마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런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가볍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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