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건망증과 거짓말
홍세표   |  2005-12-29 01:57:20  |  조회 2497 인쇄하기
며칠 전 주말 낮에 집사람이 “고구마를 쪘으니 하나 먹겠느냐”고 묻기에 “촌스럽게 웬 고구마야?”하며 짜증스럽게 되물은 일이 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의 옛 시골 친구가 손수 재배하여 보내 준 먹음직스러운 고구마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런 것을 받은 기억도 없으려니와 보내올 만한 사람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보낸 사람 이름이라도 알아두지 그랬느냐고 집사람을 나무랐다. 그녀는 필시 나의 건망증이나 먹기를 거부하는 상습적 고집 때문에 늘 하듯이 퉁명스럽게 반응했거니 생각했으리라.

나이 70이 넘은 나의 건망증이 최근 부쩍 심해진 것 같다.
잘 쓸 줄도 모르는 모바일 폰을 아무데나 팽개쳐 놓고 찾아 헤매는 일(이때는 대체로 호출음을 진동으로 바꾸어 놓고 원상 복귀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때다), 심지어는 안경을 머리에 얹어 놓고도 없어졌다고 짜증내는 일, 이런 일들이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많아졌다. 그리고는 이런 실수를 지적받으면 내 나름의 고집으로 엉터리 주장을 하여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이 늘었다. 아니 때로는 거짓주장까지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 내 실수로 저질러 놓은 일을 엉뚱하게 집사람의 탓으로 돌려 야단치는 일도 간혹 있다. 그래서 평소 내게 불평불만이 많은 그녀는 내가 이따금 건망증이라는 편리한 피난처속에 틀어박혀 무책임한 거짓말을 해댄다고 원망하는 기색이 역역하다.

어쨌든 고구마일은 잠시의 촌극으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고구마를 상기했고 바로 그 사람이 고구마를 보내 준 장본인임을 기억해냈다. 몇 년 전 까지도 유명한 기업체를 맡아 운영하다가 은퇴하여 시골의 전원주택에 살며 취미로 농사를 짓는 분이다. 그 분이 손수 재배한 고구마를 친절하게도 내게 보내 준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문제는 벌써 두해동안이나 고구마를 계속 보내주어 몹시도 감격하고 있었는데 왜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던가? 집사람이 고향친구가 보냈다고 했으니 알만한 고향친구들만 생각한 「선입관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이런 경우가 더러 있는 것 같다. 이번일이 단순히 고구마라서 망정이지 좀더 민감한 사항이었다면 내가 거짓으로 시치미를 떼고 집사람을 의도적으로 구박했다고 비난 받아도 할 수 없었겠지. 악의 없는 건망증이 터무니없는 고집과 거짓말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건망증이 심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숙지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숫자도 틀리고 사람이름도 잘 떠올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름을 대도 엉뚱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강변하다보면 무식한 고집쟁이가 되고 끝내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내가 옳다고 우겨대며 논쟁을 벌이다가 대인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상대방은 나의 사람 됨됨이까지 의심하고 혐오하지 않겠는가?

일찌감치 내 잘못을 인지하게 되면 바로 용서도 구하고 유머러스한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슬쩍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겠건만 내 건망증은 불행하게도 그렇게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아서 문제다.
그런데 건망증에서 나오는 내 거짓말은 사실 어린애의 거짓말처럼 악의가 없다.

미국의 심리학자 「P. 에크맨」은 “천진난만한 아이들도 부지중 어른 못 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데 이는 나무랄 일이 아니라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무런 악의가 없으니까.... ”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니이치에」는 “망각하는 사람은 위대하다. 잘 잊어버리는 사람은 천재다”라고 했다던가?
그래서 건망증과 거짓을 함께 병유한 내가 큰 잘못 없이 그래도 떳떳하게 살아올 수 있었나보다. 그리고 앞으로도 죄 없는 집사람에게 사사건건 계속 야단칠 것은 분명하다. 다만 건망증은 있되 거짓말은 없었으면 하는 염원은 간절하다.

아무튼 사람 사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계간 한국수필가(한국문인협회)2005.겨울호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292 문진(文鎭)의 무게  정진홍 06-01-16 2648
291 예사롭지 않은 조세저항 조짐  김병주 05-12-30 2413
290 건망증과 거짓말  2  홍세표 05-12-29 2497
289 우리에겐 꿈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었다  이수근 05-12-30 2557
288 또 다른 반미주의자의 등장 :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진덕규 05-12-26 2372
287 필트다운 두개골과 황우석 줄기세포  김영희 05-12-23 2533
286 CBS뉴스레이디 대담-허영 명지대 법학과 석좌교수  허영 05-12-22 2509
285 글로벌리제이션과 베트남의 선택  진덕규 05-12-19 2315
284 혼돈의 끝은 희망의 시작-최우석  진덕규 05-12-19 2228
283 팽형 -박경철  진덕규 05-12-12 2645
51525354555657585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