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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文鎭)의 무게
정진홍   |  2006-01-16 01:52:31  |  조회 2648 인쇄하기
제가 처음으로 두루마기를 입은 것이 언제였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직 제가 기억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두루마기가 아주 연한 분홍색이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두 번째 입은 두루마기는 연한 옥색이었습니다. 분홍색을 입기에는 너무 자랐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때 저는 그 연분홍색에 대한 아쉬움이 새 옥색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쟁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생사람조차 향방을 모르게 없어졌는데.....’ 그 밖에 잃어 아까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철없는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것저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린 추억들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가슴 속에 감추어 두고 저 혼자 가끔 들여다보면서 고이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저는 곱돌(蠟石)로 만든 문진(文鎭)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글씨를 쓴 것은 아닙니다. 저는 악필(惡筆) 중에도 악필입니다. 지금은 그것도 없어졌지만 효경(孝經)을 필사하신 아버님의 글씨는 저처럼 서예(書藝)에 어두운 눈에도 다른 글씨와 많이 달랐습니다. 힘 있고, 단아하고, 깊기조차 했습니다. 어떤 게으름이 저로 하여금 그 귀한 ‘유전인자’를 이어받지 못하게 한지는 모르지만 요즘 아우의 글씨에서 아버님의 귀한 흔적을 새삼 확인하고는 죄송함과 다행함을 아울러 지니곤 합니다.

그 곱돌문진은 담배 갑만 한 크기의 것이었는데 귀퉁이가 깨져 ‘점잖은 쓸모’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쩌다 그것이 버려지지 않고 제 책상 서랍에 보물처럼 모셔지게 되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만 기억하는 것은 아버님의 흰 두루마기 끝자락에 몇 방울 묻었던 먹물 얼룩이와 새 두루마기를 마련하실 수 없는 어머님께서 그 두루마기를 아버님께서 입으실 때마다 아버님께 잔 말씀을 하시던 것으로 미루어 아버님의 어떤 실수로 벼루가 엎어지고 문진이 깨져버린 것이라고 막연한 짐작을 할 뿐입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어떤 사물을 아쉬워하면서 정작 그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서 느꼈던 어떤 기억을 더 애틋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다시 자리를 잡아갈 무렵 갑작스레 ‘문진의 상실’을 제가 시리게 아파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붓글씨 쓰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진이 쓸모가 없었습니다. 또 ‘습자(習字)시간’에 사용하는 문진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깨진 문진을 서랍에 넣어두고 꼭 쥐어보곤 했습니다. 무게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무어라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무게는 ‘목직하게’ 손안에 들면서 은근하게 소리 없이 마음을 그렇게 ‘진득하게’ 해줍니다. 불안도, 흔들림도, 들뜸도, 넘칠 듯한 위험도 고이 가라앉게 합니다. 그 문진이 제게 그랬습니다. 아직 어렸지만 친구와 티격태격하다 ‘가슴이 아프면’ 저는 집에 돌아와 그 문진을 손에 쥐고 들었다 내렸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무게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문진을 제 서랍에 둔 다음부터 저는 온갖 제 마음의 ‘요동’을 그렇게 그 무게로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되찾을 수 없는 상실을 아파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람살이가 아닙니다. 더구나 마음의 요동이 한시도 잠자지 않는 세월을 살면서 저는 ‘새 문진 찾기’에 얼마나 애를 썼는지요. 자갈밭에 가면 끝도 없이 돌들을 손에 들고 그 무게를 느껴보곤 했습니다. 문진의 무게와 꼭 같은 그런 돌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만남은 아직도 제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체념 탓인지 제법 터득을 해서 그런지 얼마 전부터는 그것이 돌의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였음을 겨우 짐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새 문진’도 꼭 곱돌이 아니어도 되는 것이라고 바야흐로 다짐을 하곤 합니다.

나이 쉰을 반도 더 넘겼을 때 어머님은 제게 검은 두루마기를 한 벌 해주셨습니다. 그 때까지 두루마기 이야기를 제가 어머님께 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집안 예절도 많이 달라져 제사 참사에 두루마기를 입는 어른들도 거의 계시지 않습니다. 명절 때도 그러합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던 제게 어머님께서 갑작스레 두루마기를 맞추어 주신다면서 유행대로 검은 양복감으로 ‘바느질집’에 맡기겠노라고 하셨을 적에 저는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습니다. 드리는 용돈 꼬박꼬박 모으셨을 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필요하면 제가 만들어 입을 게요’ 하는 제게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은 뜻밖이었습니다. ‘내가 네 아버지 얼룩이진 두루마기 새로 만들어드리지 못한 한을 푸는 거니 다른 말 말아라!’

올해도 저는 그 두루마기를 입고 어머님께 세배를 올렸습니다. 문진의 무게가 두루마기가 되어 제게 일지도 모를 ‘노년의 요동’을 진득하게 잠재워줄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월간에세이 신년호에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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