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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0여명 대가족이었던 우리 집안의 하루 일과는 사랑방 할아버지께 문안드리는 일로 시작됐다. 근엄한 훈계의 말씀을 들었고 때로는 불호령이 내리기도 했지만 양친을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할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고 또 순종했다. 집안은 질서와 안정을 누렸다.
현재 필자가 근무하는 로펌에는 고희가 넘은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 한 분이 계신다. 평생을 기품 있게 살아온 분이라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자연히 옷깃을 여미게 되고 사무실에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나라와 사회에도 어른들이 계신다. 바로 각계의 원로들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았다는 것만으로 원로라고 하지 않는다. 평생 깨끗한 몸가짐으로 외길을 걸으면서 경륜과 덕을 쌓아 국민의 존경을 받는 분들을 일컫는다. 잎을 모두 털고 들판에 허허로이 서 있는 겨울나무처럼 현역에서 한발 물러나 세상을 관조(觀照)하며 살아가다가도,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천근의 무게가 실린 말씀으로 잘못을 꾸짖고 바로잡아주는 분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계 최고의 CEO로서 '경영의 신(神)'이라고까지 불리던 도고 도시오(土光敏夫). 그가 90대의 나이로 타계한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일본 국민은 그를 기억하고 존경한다. 탁월한 경영능력뿐 아니라 투철한 애국심, 청렴결백 그리고 사회에 대한 헌신으로 일생을 산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의 검은 정치자금 문제가 터진 1974년 가을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우리의 전경련) 회장으로 있던 도고 노인이 어느 날 밤 불쑥 총리 관저를 방문했다. 황급히 자리를 권하는 총리에게 그는 호된 질책을 퍼부었다." 자네 도대체 양심이 있는가? 검은돈을 긁어모아 정치를 하니 사회가 부패하고 나라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내일 당장 총리를 그만두고 절에 가서 삭발 수도나 하게."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존경받는 원로들이 많았다. 과거 독재 치하에서도 온갖 탄압과 고초를 무릅쓰고 바른 말 바른 행동을 하는 원로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원로들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어찌 된 연유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역대 정권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이들을 끌어들여 이용하고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내다버리는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존경심을 잃게 되고 원로의 반열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더 중요한 이유는 소위 386을 비롯한 일부 젊은이들이 오만과 독선에 빠져 원로를 업신여기는 잘못된 풍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원로들이란 자기들과는 '코드'가 맞지 않아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로 여기는가 하면, 심지어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어느 종교 지도자에 대해 '과대포장된 인물' 운운하며 수모를 가하기도 했다. 왕왕 인터넷의 익명성이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보탠다.
어느 시대나 젊은이들의 창의성과 개척정신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경륜과 사려가 모자라고 의식.무의식 간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우며 이로 인해 큰 낭패를 보는 일이 허다하다. 이러한 맹점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원로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각계각층의 요구와 주장이 여과 없이 분출되면서 마찰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이를 말리고 꾸짖고 조정할 수 있는 원로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원로가 건재하는 사회를 한시바삐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이 땅의 원로들에게 감히 진언드리고 싶다. 은둔과 침묵은 원로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나라가 분열되고 젊은이들이 방향감각을 잃은 때일수록 원로들이 분연히 나서주시기를 우리는 갈망한다.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 세상은 변해도 세상 사는 이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제발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원로를 나라의 어른으로 모시고 어려울 때 그분들에게서 세상 사는 이치와 지혜를 배우자. 베트남의 정신적 지도자인 틱낫한 스님이 말했다. "인생은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배우고 또 배워야 하는 과정이다. 겨우 네 번째 계단에 이르러 제일 높은 곳에 왔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더 높이 올라갈 기회를 잃고 만다. 다섯 번째 계단에 오르기 위해서는 네 번째 계단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2005.3.18일자 중앙일보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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