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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는 삶의 지혜
김경한   |  2006-01-05 08:16:39  |  조회 2689 인쇄하기
오후 3시, 문득 사무실을 빠져나와 용산역에서 기차를 탄다. 짧은 망설임 끝에 결정한 목적지는 변산반도의 남단에 있는 작은 어항 곰소마을. 그곳에 특별한 볼일은 없었다. 다만 20년도 더 전에 그곳을 한 번 지나친 희미한 기억이 있고, 마침 거기서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이를테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모처럼 사치스러운 탈출을 시도한 셈이다.

도시를 벗어나 봄꽃이 아름다운 산야를 접하는 순간 그토록 뒤엉켜 있던 머리가 신기할 만큼 순식간에 풀렸다. 아,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을.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신경림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잡는 이 있으면 하루밤쯤 술로 지새면서……."

정읍역에서 기차를 내려 시인의 권고대로 곰소항 가까이서 자동차를 버렸다. 어슬렁어슬렁 포구에 들어서니 축제는 그 전날 이미 끝나버렸고, 남은 것이라도 마저 팔아볼까 가설 천막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쓸쓸했다. 갖가지 자질구레한 1000원짜리 물건만 파는 잡화점에 들러 모양이 특이한 호미 한 자루를 샀다. 값을 치르면서 물어보니 개펄에서 바지락 캐는 호미라고 했다. 집에서 작은 꽃밭을 가꾸는 아내에게도 그 용도가 닿을는지? 어둠이 깔리자 들에도 바다에도 정적이 깃들었다. 한때는 인근의 위도(蝟島) 방폐장(放廢場) 문제로 그토록 시끄러웠던 지역이 아니던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마을에 하룻밤 잠자리를 구했다.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동안 무엇에 쫓기듯 너무 허둥지둥 살아온 것 같다. 이제 한숨 돌리고 싶다. 항시 무언가 결핍된 듯한 갈증과 집착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말했지,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이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큰 행복이다. "

하긴 세상을 둘러보면 더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이를테면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바로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쉴새없이 뛰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잠드는 우리의 아이들부터,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다 그것도 부족하여 저녁식사를 두세 번씩 한다는 정치인들도 그렇다. 이들에게서 무슨 심오한 정책이 나오겠는가. 공연히 쓸데없는 거친 말이나 모호한 용어를 구사하여 무익한 논쟁과 분란만 일으킨다. 제발 더 이상 평지풍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지 말고 믿음이 가는 정치, 좀 쉽고 편안한 정치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든 일은 내가 제일 잘 알고 내 손으로 직접 챙겨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좀 벗어나 주었으면 한다. 더러는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때로는 아랫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했다. "훌륭한 지도자란 안심하고 일을 맡길 유능한 인재를 골라내는 눈이 있고, 또 그들이 일하는 동안 참견하지 않을 만큼의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다. "

천주교에 피정(避靜)이라는 것이 있다. 번잡한 세상을 피해 일정 기간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좋은 말씀을 듣는 과정이다. 하루 이틀이라도 이러한 피정을 하고 나오면 심신이 맑아지고 새로운 힘이 솟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비록 신자가 아니라도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가까운 성당이나 교회, 사찰을 찾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거나, 하다못해 한적한 길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웬만큼 그윽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우리의 정치 지도자를 비롯한 모든 바쁜 이에게 이처럼 가끔씩 쉬어가는 나름대로의 재충전 방법과 여유를 권하면서 필자도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예년보다 봄꽃이 며칠씩 늦게 핀다고 야단이지만 그러나 계절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정직한 순환을 거듭할 것이다.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꽃길을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삶이란 내가 조금씩 아껴가며 꺼내놓고 싶은 행운이라고 쓴 피에르 상소의 수필을 생각했다.-2005.4.27일자 중앙일보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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