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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의 마지막 생존자 야오원위안(姚文元)의 사망
진덕규   |  2006-01-16 01:39:36  |  조회 2468 인쇄하기
쓸쓸한 죽음

지난해 12월 23일 외신은 중국 문화대혁명의 4인방(四人幇)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던 야오원위안의 죽음을 보도했다. 그는 린뺘오(林彪), 쟝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와 함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당시 그는 서슬이 시퍼렇던 권력자였으며, 그의 글은 뭇 사람의 목숨을 예사로 유린했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20년 형을 살아야 했고, 1996년에야 겨우 출소할 수 있었다.
1931년에 저장성(浙江省)에서 한 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8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50년에는 원이바오(文藝報)의 통신원을 거쳐 제팡르바오(解放日報)의 주필이 되었다. “성격이 표독스럽고 자신만 옳다는 독단에 사로잡혀 있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법정에서도 “중국 혁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했을 정도로 대단한 외골수였다. 중국 정부는 그의 죽음에 대해 뒤늦게 사망 사실만 간단히 보도했지만 “가족조차도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입소문으로 나돌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의 깊은 상처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毛澤東)의 통치 책략 때문에 빚어졌다. 그는 1950년대 말에 [대약진운동]을 주도했는데 이것은 무려 4,300여만 명이나 되는 아사자를 발생시켰을 정도로 대재앙이었다. 그러나 이를 비판했던 펑더화이(彭德懷)조차 숙청당할 정도로 억압적인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다행히 1961년부터는 리우샤오치(柳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로 인해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이 일로 마오쩌둥이 그 지위에 손상을 입게 되자 그의 처인 쟝칭 등 4인방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 내 우파의 공세를 차단하자!”면서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마오쩌둥은 이를 조장하기 위해 1966년 8월 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한 후 문화대혁명을 주창했다. 그러자 텐안먼(天安門) 광장에서는 마오쩌둥에 호응하는 백여만 명의 청년 홍위병들이 광란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 10대들은 마오쩌둥의 교시인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고 계급 투쟁을 과제로 삼아 전통 문화와 부르조아지를 파괴 처단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마오쩌둥도 더 이상 이를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67년 1월 28일에는 린뺘오(林彪)의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을 오지로 추방하는 등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은 사실상 종언을 맞게 되었다.

해서파관의 집필자

문화대혁명의 시작은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하다.”에서 비롯되었다. “해서파관”은 경극 대본인데, 그 필자는 사학자이며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吳晗)이었다. 이 경극 대본에는 중국 명대의 청렴한 관리인 해서가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상소했다가 억울하게 파직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야오원위안은 우한의 이 대본은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실각한 펑더화이는 해서로 옹호하면서도 마오쩌둥은 명의 황제 가정제로 빗대어 폄하했다고 지적했다.
우한에 대한 비평으로 야오원위안은 일약 상하이 시 혁명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올라설 수 있었으며, 문화혁명의 이론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반 마오쩌둥 계열의 인사들을 가리켜 반 혁명분자라고 공격하면서 “린뺘오 반당 집단의 사회적 기초를 논함”과 같이 독기에 가득 찬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 문화혁명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젊은 세대는 구세대의 당파주의를 청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선동했다.

야오원위안을 반면교사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선동의 글은 큰 관심을 끌게 되는데, 그것은 남을 비난하면 할수록 더 그렇게 된다. 한번 이런 식으로 문명(文名)을 얻게 되면 그것에 도취해서 스스로를 대단한 문필가로 착각하기도 한다. 깊은 철학적 사유나 겸손한 자기 반성과는 거리가 먼 채 마치 “시대적인 대 사상가”나 된 것처럼 행세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글로 무너져 내릴 사회라든가 세상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글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당할 고통을 떠올린다면 절대로 그런 글은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화대혁명과 같이 포퓰리즘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인사들이나 집단들은 반드시 야오원위안과 같은 문사로 하여금 앞장 서게 한다. 문화대혁명이 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를 30-50여 년 정도 후퇴시켰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선동의 글이 갖는 반문명적인 독소에 그저 아연해질 뿐이다.
지금 야오원위안은 자신의 글 때문에 고통받았던 수 많은 사람들을 저 세상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을까! 야오원위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권력 때문에 난무하는 글들을 읽을 때마다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SRIPS.ORG에서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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