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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1921신년사]2006 우리는 시간안에서 살아갑니다
정진홍   |  2006-01-16 01:05:25  |  조회 2261 인쇄하기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살아갑니다. 굳이 실존주의자들처럼 ‘시간 안에 던져졌다’는 부정적인 함축을 지니고 이를 묘사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분명히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시간 안의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가 있기 전에 이미 있었고, 우리가 없는 때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 안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나 세월 따라 서서히 퇴색해갑니다. 처음 짙은 색깔을 되 지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지러집니다. 그러므로 흐름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역류불가능성(逆流不可能性)을 일컫습니다. 거슬러 되 흐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간 안의 존재인 인간은 되산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다가, 글쎄요, 시간 안에 익사(溺死)해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 밖으로 퇴출(退出)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느 때에 이르면 우리는 삶을 거둡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람살이의 본디 모습인데 인간은 이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간 안의 존재’라는 자기 운명에 대한 저항이라 해도 좋을 듯한데,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인식의 객체로 삼았고, 시간을 측정하는 준거를 만들었고, 마침내 스스로 시간을 관리한다는 자리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캘린더 문화는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구체화된 문화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캘린더 문화가 지닌 특징은 처음과 끝을 만든 일입니다. 실상 개개인의 실존의 자리에서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이 자신의 시간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 이상의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간자체의 처음도 그 끝도 우리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출생과 죽음조차도 경험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의식 이전이거나 이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린더 문화는 무수한 처음과 끝으로 점철됩니다. 하루는 물론이고 한주를, 한 달을, 한 해를, 그렇게 이어지는 무수한 단위들로 이루어진 것이 캘린더입니다. 그렇다면 캘린더는 우리가 일상 느끼는 ‘편의’와 다른 매우 심각한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과 끝’의 점철은 다시 말하면 ‘출생과 죽음’의 점철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의 이어짐은 ‘출생-죽음-재생-죽음-재생-죽음-재생.....’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다고 하는 사실은 시간이 우리에게 과하는 숙명적인 구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되 태어날 수 있음이란 퇴색하는 삶을 다시 본대의 짙은 색깔로 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끝에서 이어지는 처음이란 시간의 역류가능성, 곧 삶은 되살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캘린더는 결코 소모된 시간을 계산한다든지, 시간을 관리하기 위한 편의라든지, 재단된 시간에 얽매인 자화상을 드러내주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무척 다른 문화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캘린더는 무수한 재생의 계기와 동기를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시간 예속적인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시간을 창조하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끝나고 내일이 되면 우리는 어제의 나를 끝내고 새 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주가 끝나고 새 주가 시작되거나 한 달이 끝나고 새 달이 시작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나는 이미 퇴색한 무력한 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새 시간의 마디에서는 우리가 마치 갓난아기처럼 누구도 발걸음을 내딛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만이 펼쳐지는 새 시간에 들어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동하는 삶의 보람이 펼쳐지는 것이고, 그 공간을 어떻게 채우고 완성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과해진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캘린더 문화는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참으로 오랜 인간의 지혜의 산물입니다.

다시 새해입니다. 2005년과의 단절을 철저하게 하는 만큼 그렇게 철저하게 새해는 새로운 것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어제가 없었던 것처럼 맞는 오늘이어야 비로소 우리는 새해를 맞는 준비를 갖추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시간의 단절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캘린더는 캘린더일 뿐이지 시간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되삶을 위해, 새 누리를 위해, 의도적인 몸짓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면 캘린더가 보여주는 처음과 끝을 우리는 참으로 끝과 처음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을 맞는 것은 가장 장엄한 인간의 자의식이 성숙한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1921포럼,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다행한 것은 어제의 우리 일을 이제 이 캘린더의 마디에서 서둘러 끝내고 다시 갓 태어난 생명처럼 되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의 창조는 무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창조는 있는 것에 새것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겸허한 자세로 우리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선언하고 다짐한 글들을, 그리고 회원들이 애써 진술하고 증언하고 고백한 글들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수메르 사람들이 그믐날 12개의 촛불을 켜놓았다가 새해 해뜨기를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꺼 나갔듯이 말입니다.

새해, 건강하십시오. 번거로운 일에 마음 쓰시는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참 귀한 존재라는 자존(自尊)을 지니셔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직 참 많습니다. 그리고 긴박하고요.
댁내 제절이 균안하시길 빕니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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