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화하는 라틴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지금 선거의 계절을 맞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올해까지 12개 국가에서 대통령을 뽑는다. 브라질, 멕시코,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칠레, 에콰도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미 선거를 치른 국가에서는 예외없이 좌파 대통령이 선출되었는데 이런 경향은 금년에도 이어질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이 물음은 사람들의 관심 사항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당선된 대통령 중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극좌라면, 브라질의 다 실바는 온건론자이다. 이들은 모두 좌파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차베스는 자신은 “21세기 형 사회주의자”라면서 강력한 3반론(反論), 즉 반미주의, 반 부시, 반 사유재산제를 주장하며, 심지어는 쿠바와 이란을 동맹 국가라고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브라질의 실바 대통령은 다소 시장주의적이고 거시 경제적인 안정책에 관심을 보이면서 타협을 강조하고 있다.
변화의 실체
오늘의 라틴 아메리카는 20-30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는 이전처럼 군부 독재라든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금권 정치도 찾아볼 수 없다. 민주주의와 선거 제도가 정착되었고, 다당 제도도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도 비교적 공정하게 이루어지며, 언론 자유도 보장되고 있다. 노동조합과 야당의 활동도 활발하며, 정권 교체도 다수 득표를 통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 구조도 많이 변했는데, 급속한 도시화는 농촌 사회의 붕괴를우려하게 한다. 인구 구조에서도 젊은 층이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한편, 근대화가 급속히 전파되면서 이동 전화와 인터넷, 다양한 TV 채널 및 수많은 NGO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민주주의의 한계”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민주주의를 실시한 다음부터 사람들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정치가에 대한 불신감도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마저 표명할 정도이다. 또 정치 권력이 신장된 만큼 경제나 문화, 인권은 신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격차감도 점점 심해져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한계"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불신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문제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을 선거로 도태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국민들의 불신을 받는 정치가들도 선거에서 당선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하는 투표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사회, 문화, 인권의 지체 현상도 심각한데,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폭력이나 납치 같은 강력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라질만 해도 총기 사망자가 하루에 100명을 넘으며, 교도소의 수감 상태도 폭발 직전이다. 가령 죄수의 50% 이상이 정상적인 재판도 받지 않은 채 무조건 억류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 등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는 마약 거래가 횡행하고 있다.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으며, 부정과 부패도 이전보다 더 심하게 만연되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만 부르짖는 정치가들을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미국 때문에 빚어진 일"
다른 지역에서는 “좌파가 몰락”하고 있는데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만은 좌파가 점점 더 기세를 올리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지역에서는 좌파 정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구원을 약속하면서 미국을 강하게 배격하고 있으며,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를 약속함으로써 빈곤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이 지역의 계급 갈등은 심각한 상황이다.
이 지역 거주자 5억 5천만 명 중 무려 2억 2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 상태에 놓여 있는데, 놀라운 것은 약 1억에 가까운 인구가 단돈 1 달러에도 못 미치는 금액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지역 빈민들은 그들의 가난이 “미국에 결탁한 부자들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장 지향적인 미국식 민주주의보다 지금 당장 “가진 자를 추방하는 것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차베스에게 점점 더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차베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금방 풍요로움을 안겨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가진 자를 추방하겠다는 약속은 “시원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차베스를 선호하고 미국을 배격한다. 따라서 어느 경우이건 빈곤과 계급 갈등이 심한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