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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은 내 젊은 날의 꿈과 추억이 살아서 숨 쉬는 마음의 고향이다. 대학생이었던 20대에는 빗토리오 데 시카의 <종착역>, 캬롤 리이드의 <제3의 사나이>,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 르네 끌레망의 <금지된 작란> 등 당시대 최고의 명작들과 만나는 재미로 어떤 날은 하루 종일을 같은 영화관에서 보낼 때도 있었다. 30대가 되어서는 내가 쓴 시나리오 <말띠 여대생>,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팔도강산> 등이 스크린에 옮겨지던 시절이었으므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그들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구실로 영화관을 공부방으로 삼으면서 살았다. 그런 추억의 산실이요, 마음의 고향인 영화관이 60대로 들어서면서는 조폭들이 장악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영화관에 갈 때마다 욕바가지를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영화를 보노라면 그 욕설과 비속어에 소름이 끼치다 못해 분노가 치솟곤 한다. 문자로 작품을 써야하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덕목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모국어를 탁마하는 일이다. 국어를 갈고 닦아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소임은 국어학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작가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다. 제나라 말 중에서 가장 품위 없고, 천박한 말들만 주어모아서 작품을 쓰고, 그것을 배우들에게 외치기를 강요하는 감독이라면 작가이기 전에 지식인의 반열에도 들 자격도 없다. 이들의 무지와 만용이 저지른 욕설과 비속어의 구사는 마침내 국회위원, 장관들의 입에서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나의 50대를 아우르는 10년 세월은 대하역사드라마 <조선왕조5백년> 한 편을 쓰는 일에 소진되었다. 드라마 한 편의 길이가 1주일에 2시간씩 8년 9개월이라는 기록은 전대미문이라는 말을 써도 미안할 것이 없다. 이 한편의 드라마를 쓰기 위해 내 40대의 10년은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한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는 고초와 함께 했다. 그때는 아직 왕조실록의 국역 사업이 완결되지 않은 때여서 한자로 된 원전을 읽어야 하는 고통은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대동야승>으로 총집(叢輯)된 1백여 권의 야사집을 스승 없이 훑어야 하는 답답함은 말로 형언하기 가 어렵다. 그런 노고를 밑천으로 60대 중반까지 역사극에만 매달려 왔던 탓에 ‘정사의 대중화’에 이바지 하였다는 분에 넘치는 찬사도 들었다.
70대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욕바가지를 뒤집어쓰기가 싫어서 되도록 영화관 출입을 삼가고 있지만, 대학원에서 시나리오창작을 강의해야 하는 처지라 싫어도 가야할 때가 많다. 내 청춘의 꿈과 추억이 묻어나는 영화관에 앉아 선정과 욕설이 난무하는 우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서 숨결이 가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슬며시 일어서 극장 밖으로 나오곤 한다.
요즘 방송되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도 즐거움보다 짜증이 날 때가 훨씬 더 많다. 불륜을 싸고도는 결손가정의 얘기는 아침드라마부터 시작하여 밤늦게 까지 계속된다. 적어도 아침드라마 만은 그날 하루의 활력이 되고 지혜를 제공해 주는 밝은 드라마라야 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정도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방송이다. 역사드라마를 보아도 우리말에 대한 소양은 수준이하다. ‘신첩(臣妾)’이라는 말은 왕비나 후궁이 오직 임금에게만 쓰는 궁중용어이다. 왕비나 후궁들이 정승이나 판서와 마주 앉아서 ‘신첩’이 라고 뇌까린다면, 왕비가 정승의 신하가 되고 판서의 마누라가 되는데 이게 어디 말이나 될법한 소린가. ‘어전(御前)’은 임금의 탑전이라는 뜻이지만, 짧게 발음하면 생선을 파는 가게가 된다. 음의 장단도 구별하지 못하는 세태가 정말로 한심하다. 보다 못해 그 까닭을 캐물었더니 연습을 할 시간이 없단다. 극본이 늦어서 녹화당일에도 완결이 아닌 조각 대본으로 나온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렇게 되면 시스템이 무너진 채로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히트한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이비 역사드라마는 그 내용이 만화만큼이나 황당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이 드라마의 대사는 인터넷의 댓글에서 쓰이는 속어들을 입에 담으면서 친절하게도 자막을 넣어서 해설을 곁들이는 데, 그 자막도 글자를 거꾸로 뒤집어서 흐르게 하는 등 장난치듯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대략난감’, ‘열공’ 등과 같은 네티즌들이 쓰는 은어성 용어들을 공중파 방송이 앞장서서 사용하고 퍼트린다면 방송의 역기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
내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관에선 선정과 욕설이 난무하고, 방송드라마까지도 날로 품격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제는 그도 도리 없이 원로 방송인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다니는 친구 김동건 아나운서는 나를 만날 때마다 따지듯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신형, 나 같은 사람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 한 편 쯤은 있어야 할 게 아니요!”
아, 그의 말이 소름끼치도록 절실한데도 대책이 없다. 온 가족이 오손도순 모여 앉아 우리의 지난 역사를 진솔하게 뒤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역사드라마를 한 편 써야 하겠는데, 이런 생각을 내색이라도 하면 “노인네가 주제 파악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는 세태가 되었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극작가. 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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