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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되는 의문은
지난 주 야코블레프(Alexander Yakovlev)에 관한 자료를 다시 읽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그는 지난 해 10월에 81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논의 중이다. 그가 미친 영향은 쉽사리 평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를 생각하면 먼저 하나의 사실이 떠오른다. “지식인의 참여 문제”다.
해 묵은 논쟁이라 신선하지도, 흥미롭지도 않지만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이 문제가 다시 떠오를 만큼 혼란스럽다. 정부 산하 각종 위원회의 위원으로, 시민 단체의 임원으로, 심지어는 정치적인 직위까지 맡아 활동하는 지식인들을 볼 때마다 시대와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과연 미래 지향에 대한 올바른 가치 관념에 따라 “전천후 지식인”으로 활동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충실한 공산당원 야코블레프
야코블레프도 참여 지식인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 초기인 1923년에 볼가 강변에 있는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한 사람 밖에 없었지만 그는 부모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학교에 가기 전부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차 대전 때는 자진 입대했으나 1943년에 큰 부상으로 제대했다. 그는 공산당에도 입당했으며, 고향 근처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모스크바의 공산당 아카데미에서 사회과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확신과 애국심으로 출세의 길을 달릴 수 있었다.
1958-9년에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교환 학생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하기도 했고, 1965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전 담당 일을 맡아 했다. 그러나 1972년에 한 주간지에 소련의 민족주의를 쇼비니즘으로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이 일로 인해 당 지도부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캐나다 주재 소련 대사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1983년에는 여기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평생 지우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고르바초프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온 후에는 소련 최고의 싱크 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IMEMO]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1985년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되자 그는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이데올로기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참모가 되어 “혁신 정책”의 구상자로 일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동유럽 불개입 정책을 건의한 것도 이 때였다.
그는 러시아의 미래를 구상하면서 러시아는 공산주의보다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며, 공산당 체제를 종식하고 다원적 경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념이자 체제”라고 선언하기도 했고, 공산주의는 이제 용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념을 억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며, 반문명적인 행위!”라는 그의 주장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과 [글라스노스트, 개방]의 정치적 성격을 의미했다.
참여 지식인의 무한 책임
1991년에는 세바르드나제(E. Shevardnadze) 외상과 함께 [민주개혁운동 선언서]을 발표했는데, 이 때부터 공산당 체제 극복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러시아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러시아의 권위주의가 사람들을 비민주적으로 길들여 놓았다.--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월한 전제 군주를 기대한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한동안 정치 사회를 혼란 속에 떨어지게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보다 아픔을 준 것 같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비난도 높다!”고 말할 때면 그는 “사람들은 페레스트로이카로 자유를 얻었다. 자유,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맞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모방자라면서 배분적 평등을 경시했다고 비난했으며, 개혁과 개방으로 맑스주의를 종언시킨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참여 지식인의 무한 책임”을 떠올리게 된다. 단지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지식인의 정치 참여나 사회 참여는 멈춰져야 마땅하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예지가 없다면 더욱 그렇다. 역사는 참여 지식인의 행적을 절대로 눈감아 주지 않는다. 야코블레프를 떠올릴 때마다 개혁을 주장하는 지식인일수록 그 참여의 의미를 스스로 되새김질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srips.org에서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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