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아름다운 이름, 청백리
신봉승   |  2006-03-20 01:44:55  |  조회 2465 인쇄하기
조선시대의 공직자가 평생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는 청백리淸白吏의 반열에 오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가통을 소중히 여기는 명문가에서는 우리 집안에는 ‘청백리’가 몇 분 있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옛 사람들도 ‘청백리의 똥구멍은 송곳 부리 같다’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너무도 청렴하기 때문에 재물을 모으지 못하고 아주 가난하게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정승이나 판서처럼 권력을 휘들 수 있는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가난에서 헤어나질 못하였기에 청백리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 있는 돈이 없어서 그 비용을 언제나 국가가 부담해 주었다는 기록이 즐비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노라면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행적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대개가 빗물이 새는 초가삼간에서 살았으며, 관복이 한 벌뿐이어서 퇴청하면 빨아 널게 되는데, 바로 그때 임금님이 급히 찾을 수도 있지를 않겠습니까.

“대감, 어쩌면 좋지요. 관복이 이렇게 젖었는데….”

관복을 빨아 넌 정경부인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허허허. 그냥 입어야지요. 비 오는 날도 입었질 않았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 판서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관복을 입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오늘을 사는 고위 공직자들의 천박한 행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딱하고 한심하기만 합니다.

세종 조 때 유관柳寬이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 정승 댁 초가삼간은 방안에도 비가 내릴 정도로 청빈했습니다. 우산을 쓰고 책을 읽던 유 정승이 정경부인에게 물었답니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살고…?”

정말 아름답고 고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종은 유관의 초가를 국비로 수리해 주기로 작정을 했습니다만, 유관의 반대가 있을 것이 뻔 하여서, 우선 허물어진 담장부터 고치게 하였습니다. 물론 유관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유관은 정부에서 고쳐준 담장을 모두 헐어내고 세종에게 항의하였습니다. 백성들의 혈세를 받아서 정승의 집 담장을 고치라는 구절이 어느 책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조정왕조가 가난하면서도 5백 년 동안이나 사직이 유지될 수 있었던 정수를 보여주는 정말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공직자의 삶에서 가장 큰 보람으로 평가되는 청백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임했을까요. 물론 요즘같이 한 때, 혹은 한해의 선행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의 공덕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청백리는 관직에 등용 된지가 수 십 년이 넘는 정승이나 판서들에서 선임되었습니다.

또 선임하는 절차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청백리의 선임은 임금이 단독으로 정하는 것도 아니며 당시의 조정에서 임의로 정하지도 못했습니다. 형식적으로, 혹은 한두 가지 선행으로 만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야在野의 한림翰林들에게 선임을 의뢰하기도 하였습니다.

청백리의 선임과 같은 명예로운 일을 제도권 밖에서 추천을 받아야 했던 것은 사견의 개입을 배제하고,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왕조와 같은 절대왕권의 시대에 이 같은 민주적이 방법이 채택되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기에 청백리에 선임되면 당대의 명예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당사자의 사후까지 그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이며, 아름답고 명예로운 이름을 후세에까지 남기게 됩니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청렴은 목자의 본무요, 모든 선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목자가 될 수 없다. 청렴이야말로 다시없는 큰 장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큰 욕심쟁일 수록 반드시 청렴한 것이니,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까닭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깊은 지혜를 가진 선비로서 청렴을 교훈삼고 탐욕을 경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읽기는 편하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태산과도 같은 교훈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조선왕조 시대에는 몇 사람이나 되는 청백리가 있었을까요. 조건이 이러하다면 흔하지 않아야 당연합니다.

여러 기록이 조금씩 다릅니다만, <조선왕조실록>은 137명이라 적고 있고, <조선조 청백리지>는 115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문헌비고>에 적힌 수는 142명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500년 조선왕조에서 이만한 청백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 후손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시대의 공직자들이 귀감을 삼아서 마땅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이고도 남습니다.-shinb33.pe.kr에서
<극작가, 예술원회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352 아름다운 이름, 청백리  신봉승 06-03-20 2465
351 나의 사랑하는 삶 -김희옥  1  홍세표 06-03-20 2449
350 나이 70이 넘어 생각하는 것들  홍세표 06-03-20 2660
349 정치에 울고 야구에 웃었다  김영희 06-03-17 2406
348 안일한 에너지 대책  홍세표 06-03-14 2384
347 칠레 최초의 여자 대통령 바첼레트의 취임  진덕규 06-03-20 2617
346 북한인권문제를 다루어야-서경석  서지문 06-03-06 2397
345 이해찬의 얼굴, 참여정부의 얼굴  서지문 06-03-06 2446
344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에 대한 회상  진덕규 06-03-17 2524
343 도전에 직면한 법  김형선 06-03-06 2412
4142434445464748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