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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개종(改宗)을 이유로 기소돼 사형당할 뻔했던 압둘 라흐만이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석방됐다. 얼핏 중세의 이른바 ‘암흑시대’에나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다른 종교 배척이 오늘도 여전히 세계의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일한 문화권에서 하나의 종교가 지배적인 단원사회에서는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않는 태도가 어쩌면 당연했다. 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데 이질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일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문화권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이지고 있고, 삶의 내용은 지극히 다양해졌다. 종교는 분명하게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상대적으로 종교가 더 단원적이라든지 더 다원적이라든지 하는 문화권의 차이는 있어도 이제 특정한 종교가 유일하고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미 특정한 음식, 옷, 음악, 삶의 스타일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바른 삶일 수가 없듯이 자기의 전통적 정체성을 지워버리지 않아도 ‘다른 것’을 승인하고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태도’를 갖지 않고는 오늘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다원사회가 요청하는 것은 지배도 통합도 아니다. 협조와 조화이다.
그런데 종교란 무엇인가. 그 어느 종교도 증오나 저주를 가르치는 종교는 없다. 종교는 한결같이 인간의 문제는 사랑과 자비와 지고한 가치에 대한 순종을 통해 비로소 풀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종교의 종국적인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고, 사람살이가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역사는 종교가 스스로 주장하고 가르치는 이념을 한번도 스스로 실천한 일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의 증오와 자비라는 이름의 저주를 드러낸 심각한 ‘살육의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슬픈 역설’이다.
문제는 개개 종교가 자신만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주장을 하는 데서 비롯된다. 자기만이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의식을 갖는 순간부터 종교는 ‘악의 화신’이 된다. 스스로 자신을 배신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선언은 ‘자기 절대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주체의 생존을 위해 요청되는 ‘타자와의 관계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무지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그 일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종교문화의 이러한 ‘심각한 딜레마’ 또는 ‘질병’은 종교 이외의 영역 곳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사회의 여러 부문들이나 단위주체들이 자신들을 ‘종교적인 구조’로 다듬고 거기에서 비롯하는 의식을 가지고 종교가 직면한 똑같은 딜레마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정치세력이 배타적·독선적으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든지 어느 국가나 문명이 그렇게 자기를 정당화하는 일이 그러하다. 중동의 전쟁은 전형적인 사례다. 오늘날의 갈등은 계급적인 것도 아니고, 국가적인 것도 아니며, 체제의 이념적 지향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특정한 주체가 자신을 ‘절대적인 선’으로 주장하는 ‘종교적 태도’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라흐만의 일은 중동의 문화권에서 일어난 ‘낯설고 흥미로운 사건’만일 수 없다. 우리 사회와 문화에도 구석구석에서 숨어 움직이는 끔찍한 징후가 다만 그 곳에서는 그대로 노출됐을 뿐이다. 자신만이 선을 전유(專有)하고 있다는 발언이 들릴 때면 그것이 종교든 정치든 이념이든 우리는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반사회적이고, 반시대적이며, 결국 반인간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2006.3.29일자 문화일보
<한림대 특임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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