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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말과 정객의 말
김영희   |  2005-10-14 12:29:44  |  조회 2043 인쇄하기
이해찬 국무총리가 언론을 향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발언들을 듣노라면 스피로 애그뉴의 비극을 생각하게 된다. 애그뉴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의 부통령이었다. 이 총리와 애그뉴를 한 줄에 놓고 생각하다 보면 칼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른다.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동일한 사건과 인물은 세계역사의 무대에 두번 등장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웃음거리로.

***닉슨정부 때 애그뉴 부통령 연상

닉슨은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 속에서 정치를 했다. 그는 자신의 베트남 평화안이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주요 신문과 3대 방송의 비판을 받자 언론정책을 방어에서 적극 공세로 바꾸고 부통령 애그뉴를 공격의 선봉에 세웠다. 미국의 보수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애그뉴에게는 잘 어울리는 악역이었다.

애그뉴는 1969년 전국을 돌면서 언론을 공격했다. 그는 언론이 몇몇 사람의 손에 독점된 현실을 개탄하고, 언론사의 편집.제작간부 몇 사람이 나라의 중대사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결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선출되지 않은 언론사 간부들이 면책특권과 함께 그런 권리를 누리는 시대는 끝장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언론은 애그뉴의 그런 주장에 '애그뉴 독트린'이라는 익살스러운 이름을 붙여 줬다.

그로부터 35년 뒤의 한국. 이 총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애그뉴의 닮은꼴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다만 언론을 공격하는 그의 말투와 빈도로 보면 이 총리가 일부 언론에 가진 적개심은 애그뉴가 미국 신문에 가졌던 적개심을 능가한다. 그는 언론사들이 광고수입을 올리려고 경기부양을 볶아댄다, 조선.동아는 까불지 말라, 조선.동아는 내 손아귀에 있다고 말한다. 애그뉴가 언론과의 전쟁에서 닉슨의 대리인이었던 것 같이 이 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리인이다. 노 대통령은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이미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애그뉴는 언론과의 싸움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탈세 혐의로 몰려 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비극을 맞았다. 35년의 시차를 두고 이 총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애그뉴의 아류로 오해받을 연기를 하고 있다. 정부에 일부 신문들의 노무현 정부 비판을 "저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다고 해도 이 총리의 발언은 너무 냉소적이고 총리의 격에 안 맞는다. 여당의원까지 그의 발언을 "총리답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 총리의 연기가 희극이라면 그것은 희극을 가장한 비극의 전주곡이다. 이 총리의 언론 관련 발언은 386정부가 추진하는 일부 신문 길들이기의 큰 그림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정부와 여당은 조.중.동의 신문시장 점유율을 지금의 70% 이상에서 60% 아래로 끌어내리고 나머지 신문들의 상대적인 힘을 끌어올리려고 한다. 조.중.동의 어느 한 신문의 시장점유율이 30%를 넘으면 페널티를 물어야 한다. 언론에 적용되는 반시장적 하향평준화다. 여당의 언론개혁법안이 통과되면 조.중.동은 신문을 잘 못 만들면서 독자들의 구독신청을 거절해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비판 신문 길들이기에 불과

방송 쪽에서는 개혁에 코드를 맞추지 않은 SBS가 방송 재허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강도 높은 압박을 받는다. 재허가를 못 받는다는 것은 방송사 간판을 내린다는 의미다. 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의 언론통폐합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인가. 이 총리의 원색적인 신문공격은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려 포퓰리즘적 개혁의 걸림돌을 제거하자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월터 리프먼은 정치가(Statesman)와 정객(Politician)을 구별했다. 그는 정객은 편견과 당파성에 따라 자신이 속한 당과 계층의 이익을 좇고, 정치가는 눈앞의 이익보다 크고 장기적인 이익에 봉사한다고 말했다. 이 총리의 언행은 정객 수준이다. 2007 대선에 관심이 없지 않을 그가 정객으로 애그뉴같이 '이해찬 독트린'에 집착한다면 그도 불행하고 나라도 불행할 것이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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