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이럴수가"를 연발하지 않고서는 뉴스를 접하기 어려운 게 요즘 세태다.이럴 때 냉소주의가 나긋나긋한 유혹으로 다가온다."다 그런거야", 한마디 말로 세상 이치를 꿰뚫는 통찰력을 과시하고픈 유혹이다.
눈앞의 문제와 관련된 전문 지식이나 경험 없이도 만민을 평등화시키는 불도저의 굉음이 "모두 도둑놈들이야"라는 말이다.세상이 과연 그러한가?
요즘 금융계의 두 가지 화두 역시 음모론으로 점철된다. 우선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매각한 경위가 문제되고 있다.멀쩡한 은행을 외국자본에 헐값에 팔아 넘기기 위해 관료가 개입했다는 재무자료 조작설이다. 입방아 찧기 좋은 요소들을 골고루 담은 얘기지만,곡식과 잡티를 가려내 취해야 국민경제 건강에 유익하다.
자기자본을 위험가중자산으로 나눠 산출하는 BIS비율은 전문가(회계법인)의 몫이다. 여기에 관료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산출 당시 이미 드러난 카드채 부실과 SK사채,하이닉스 등 잠재한 부실요인 때문에 위험가중치가 높아,대손충당금 적립 부담이 크다고 판단됐다면 낮아질 수 있는 게 BIS비율이다.
당시의 거시변수동향,관련산업전망,회계사의 전문가적 판단의 합작수치를 몇 해 지난 시점의 다른 상황에서 사후적으로 잘잘못을 따져 묻고 있다.실무자의 계산착오 여지는 있지만 정책당국의 계획적인 음모는 없다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대과 없이 자리 지키고 승진하길 노리는 것이 관료의 생리이지,그토록 간 크고 골 빈 관료는 희귀종이기 때문이다.웬만한 외부 입김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금융계 인사문제가 다음 화두다.원칙 없음이 원칙처럼 돼 금융의 "카오스(대혼돈)"라고 이름할 만하다.한국금융에 있어서 진정한 민영화 은행이 있는지,중앙은행 독립성이 확보되고 있는지가 의심을 넘어 의혹의 먹구름에 가려있다.1997년 환란 이후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온 은행의 지배구조 개선과 한국은행 독립확보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다.
한때 10개이던 지방은행 중 사실상 3개만 독자 생존하게 됐을 정도로 어려운 여건에서 부산은행은 성공사례다.그 은행장(한은 출신)이 행내에서 자율적으로 중임 추천됐으나,외풍에 밀려 '후진을 위해 용퇴'했고 그대신 금통위원이 임명됐다고 한다.
그 연쇄 작용으로 차기 금융위원 남은 한 자리가 관료출신이 차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잡혀 있다는 것이 인사 도미노의 골자다.민영 은행의 CEO 선출에 규제당국이 적격성 심사기준 이외에 높은 분의 출신학교 코드를 관철했다고 의심을 받을 만큼 뻔뻔해졌나? 규제당국이 높은 곳의 눈치를 알아서 기며 인사 개입한다면 은행 민영화가 무엇이고,시장경제는 무엇인가?
중앙은행 독립의 요체는 금융통화정책 수립과정의 독립이다.그렇다면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외풍에도 버텨낼 곧은 인품의 인사들로 금통위가 구성돼야 한다.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개별인사의 적격성을 따져 금통위원 임명이 결정돼야지,다른 자리 인사 때문에 밀고 밀리는 연결고리 끝 처리 모양새가 돼서는 안된다.유관기관끼리 나눠먹기식 인사를 보면 높은 곳의 인사위원회가 헛돌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전자의 음모론은 관료의 커리어관리 속성상 수긍되지 않는다. 하나의 국가기관이 '조작'설을 언론에 퍼뜨려 공적사회 전체의 대국민신망에 먹칠하는 게 과연 국익에 이바지하는가? 있는 비리를 덮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비리 개연성을 긁어 얻는 감사 당국의 개별적 신망 제고가 관료계의 총체적 신뢰추락을 상쇄하고 무엇이 남는가를 묻는다. 이것은 후자의 음모론과 연결된다.공공부문 기관들의 집단이기주의는 빈틈을 노리고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도미노 음모론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음모론이 없는 사회여야 국민이 삶의 보람을 느끼고 생업에 충실하게 된다.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답답하다.-한국경제신문 4월17일자에서
<서강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