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렸을 때의 세종대왕은 독서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질 때까지 읽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같은 책을 몇 번이나 읽으면 가죽 끈이 닳아서 끊어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기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조선조 말기에 살았던 화서 이항로선생의 글에 다음과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중용中庸을 외기를 만 번까지 하였는데 욀 때마다 뜻이 달았다. 살아서 한 번 더 외게 된다면 무엇을 깨닫게 될 지 심히 걱정된다.

옛 선현들이 같은 책을 만 번까지 되풀이 읽게 되는 것은 읽어야 할 책의 종류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선비가 읽어야 할 기본도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아홉 권입니다. 그러니까 만 번까지 되풀이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유재한丁酉再亂 때(1600년)에 왜국으로 잡혀간 전쟁포로 강항姜沆선생은 왜인들에게 <사서오경>을 외와서 가르쳤습니다. 감동한 왜인들은 강항선생에게 <사서오경>을 한 벌 써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강항선생은 일본인 제자들을 위하여 <사서오경>을 외워서 써주었습니다. 그 원본이 지금도 일본국 내각도서관에 남아 있습니다. 같은 책을 만 번 정도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종대왕은 태종이라는 거목 아래서 어려운 시대를 이끌어갈 식견과 표준을 완벽하게 익혔고, 통치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연치 스물두 살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면 아직 한 나라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린나이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충분한 독서량으로 하늘의 이치를 두루 살필 수가 있었고, 또한 지행知行하는 실천력으로 황희, 맹사성, 박은 등과 같은 탁월한 신하들을 거느릴 수 있는 젊은 지성이었습니다.

그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불운하게도 무려 7년 동안을 혹독한 가뭄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때의 일을 역사는 ‘세종의 7年 대한大旱’이라고 적습니다. 백성들의 운명이 오직 농사에 달려 있던 시절, 요즘과 같이 수리시설마저 넉넉하지 못했던 처지에 내리 7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면 백성들의 살길이 막연해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젊은 세종은 육조관아의 큰 길(지금의 광화문 거리)에 가마솥을 내다 걸게 하고 도성백성들에게 죽을 끓여서 먹이게 했습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진휼은 이런 정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지성 세종은 배고파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지켜보다가 경복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어보가 경회루 근처에 이르자 세종은 따르는 신료들에게 시름에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습니다.
이때의 일을 <세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짚으로 덮게 하였으니 장식은 모두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다. 임금은 이때에 와서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이 별실에서 기거하였다.

백성들의 고초와 아픔을 몸소 체험으로 감당하려는 청년 세종의 솔선수범이 여기에 이르자 신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승과 판서들은 연일 세종이 기거하는 초가마당에 꿇어앉아 침전으로 들 것을 진언하였고, 왕비 소헌왕후 또한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백성들이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데, 어찌 내가 호화로운 침전에 누어 편한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완벽한 식견이 빚어내는 리더십입니다. 식견은 옳고 그른 것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표준이 있어야 비로소 구색을 갖추게 됩니다.

요즘의 정치인들이 청년 세종의 식견과 표준이 어떤 절차에 의해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는 지를 알고나 있는지 자못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정치 환경이 날로 폐단의 질곡으로만 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배우지는 못하더라도 흉내라도 좀 내주었으면 하는 심정일 뿐입니다.

청년 세종을 괴롭혔던 또 하나의 불행을 그의 치세에 국상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재위 중에 아버님 태종과 어머님 원경왕후 그리고 큰아버님 정종과 사랑하는 아내 소헌왕후와의 사별로, 재위기간(32년)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무려 10여 년 동안을 상복을 입고 지내야 했습니다.

수물 여섯 살의 세종은 아버님 태종의 위패가 모셔진 빈전殯殿 밖에 꿇어앉아서 하루 세 번씩 곡을 해야 합니다. 그런 어느 날,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서 그 빗물이 당신의 무릎에까지 차이는데도 빈전의 마당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놀란 신하들이 평상을 들고 달려와서 올라앉기를 애원하는데도 이를 가납하지 않았다고 그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라면, 젊은 세종의 솔선수범이 어느 경지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세종은 높은 학문과 실천력을 겸비한 현군이었습니다.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첫 번째 덕목은 위민爲民, 그러니까 철저한 민본정치를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를 않았습니다. 심지어 새롭게 마련한 토지세의 시행도 백성들의 뜻을 물어서 폐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방불케 하는 정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조선왕조의 스물일곱 분 임금 가운데서 오직 세종만이 성군聖君으로 불립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완벽한 식견을 갖추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표준을 정했을 때, 비로소 윤리성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꼭 정치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잡다한 일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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