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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날 오후에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의 구석 자리에도 싫증이 났고, 몇 사람이 같이 쓰는 연구실도 이름뿐이어서 선뜻 발길이 내키지 않았다. 도서관 옆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학생들의 바쁜 걸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 학교 게시판에서 읽은 존 K.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교수 초청 특별 공개 강좌에 대한 광고였다. 강의가 시작되려면 아직 30분 정도 남았으니 잘 됐다는 생각에서 잰 걸음으로 달려갔다.
강당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뒷쪽 자리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니 학생들보다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예정 시간이 되었을 때 강당 앞쪽 정문으로 큰 키에 각진 얼굴의 노인인 갤브레이스가 젊은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팡이를 짚은 채 꾸부정한 모습으로 들어섰고, 자그마한 키의 부인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 일어나 박수로 노교수를 맞았으며, 강연 도중에도 몇 차례나 기립박수로 존경을 표시했었다. 이것이 10년 전에 본 갤브레이스 교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이다.
NYT의 추도 기사
갤브레이스 교수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날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 NYT의 추도 기사는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 우상 파괴적인 경제학자로 교수이며 외교관이고 지난 반 세기 동안 수많은 저서를 통해 자유주의 경제학파에게 맹공을 가했지만 사실은 그 자신도 그 학파의 구성원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 토요일(4월 29일) 미국 케임브리지의 한 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97세.”
NYT는 "갤브레이스는 33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 중에서도 1958년에 간행된 [풍요로운 사회]는 밀리언셀러였는데, 그가 이 책에서 설파했던 주장은 미국의 시대적 가치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추도문의 마지막 구절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풍요롭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등 정부의 개입과 역할을 기대했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손잡고 지내게 하고, 풍요로운 사람들도 그대로 지내게 하고, 편안한 사람들도 그렇게 지낼 수 있게 내버려두자.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만은 정부가 돌봐줄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주자.”는 그의 주장을 실어 놓았다.
비주류의 관점
갤브레이스는 1908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업에 종사했고 어머니는 지방 정치에 참여했던 여장부였다. 그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농과대학을 거쳐 1934년에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는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옮겨간” 대표적 인물이었다. 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하버드에서 강의를 했으며, 1937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 후 1년 동안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연구교수로 지냈는데 이 때 그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교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39-40년에는 프린스턴에서 가르쳤지만 1949년에는 다시 하버드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경제학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그는 미국 주류 경제학의 계량 중심적 접근을 비판하는 대신 전통적인 정치 경제학을 중시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저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지난 날을 ‘빈곤의 시기’로, 지금을 ‘풍요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이 시대에 알맞는 새로운 경제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정치에의 곁눈질
그는 대다수 미국인들이 고가의 상품을 즐겨 사용하지만 그들 주변의 공원은 모두 오염되었고 아이들은 아직도 낡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제의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에서 고속도로 건설과 교육 투자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도 이러한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에게 미국의 제도주의 경제학자라든가 미국적 케인즈주의자라는 지칭이 따라다니는 것도 이러한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한때 강단 경제학자에서 참여 경제학자로 나서기도 했으며, [포천, Fortune]지의 편집인이 되기도 했고, 2차 대전 때에는 연방정부의 가격통계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또 정계와 연관을 맺어 미국 민주당 지도자들의 정치 자문에도 응했으며, 특히 케네디 대통령 때에는 그의 보좌관으로 인도 대사가 되기도 했다. 또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케네디, 존슨 등 세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에도 참여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견해 차이로 존슨 대통령과 갈라선 뒤에는 정계와 손을 끊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의 사회민주주의적인 주장은 “조야한 개인주의자들이 판치는 대지” 위에다 실패의 자국만 남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삶이야말로 어느 평자의 말이나 시지프스(Sisyphus)의 신화처럼 산정으로 바위를 옮기는 지적 작업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그 날 강당에서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웅얼거렸던 갤브레이스를 떠올리면서 그의 명복을 빈다.-srips.org에서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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