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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현충일에 6.25 사변 중에 돌아가신 분들이 묻힌 커다란 무덤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 묻힌 분들은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닙니다. 국가의 대단한 유공자도 아닙니다. 그저 남침한 세력들에게 밉보인 사람들입니다. 살해된 3천여 명 중에서 누구의 시신인지 확인되지 않은 600여명이 묻힌 곳입니다. 그 무덤에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유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56년 전의 일이고보니 돌아간 분들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자식들이 이제는 자기네 손자를 볼 나이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30여년 전만해도 이 곳 분위기는 무척 무거웠습니다. 가난과 온갖 어려움을 겨우 견뎌낸 중년의 사람들이 아직 피곤을 떨치지 못한 채, 그래도 돌아간 어르신들께 찾아와 살아온 세월과 보람을 아뢸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또는 긍지로, 사뭇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 남편을 잃은 아낙, 자식을 빼앗긴 어버이의 세월이 편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는 한을 품고 벌써 저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자식이나 아낙은 절망과 분노와 좌절과 억울함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세월을 버텨왔습니다. 배고픔도 헐벗음도 그렇게 견뎠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처절한 외로움이었습니다. 혈육의 죽음을 팔아 덕을 보겠다고 한 적도 없고, 그 비참한 일을 훈장처럼 달고 싶어 안달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유족들의 모임을 그러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덤조차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전쟁동안 서둘러 마련한 ‘매장지’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혐오시설’이 됐습니다. 그래서 철거대상이 되었지만 나라도 이웃도 아무런 배려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유족들은 ‘거기 묻힌 자의 혈연’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죄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세월이 바뀌면서’ 그 죽음은 서서히 나라로부터 ‘간과해야 마땅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듯 합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무덤은 그 많은 사연을 안고 조용히 침묵할 뿐입니다. 하지만 자란 자식들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다시 자식을 낳았습니다. 기억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애비는 자식에게 자신의 경험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자식은 다시 자신의 애비의 기억을 자기 자식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고 또 느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올해도 무덤 앞에서는 애를 끊는 오열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잊었노라고 스스로 몇 번이고 다짐한 분노와 증오가 이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기만 하면 새롭게 솟아오르는 일이 올해에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라도 이웃도 허울 좋은 한울타리일 뿐 오히려 그로 인한 배신감이 낳는 처절한 외로움이 올해라고 해서 더 가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무덤 앞에만 서면 세월은 거침없는 역류(逆流)를 현실화하면서 총성과 피비린내와 그 속에서 절규하며 떠도는 넋들의 옷자락을 잡고자 울부짖는 내 모습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재연되었습니다.
그러나 올해 나는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손자 녀석이 아장거리며 들꽃 한 송이를 꺾어들고 할아버지 품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경건하기만 했던 할아버지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번졌습니다. 어쩌면 몇 해 뒤에는 그런 아장거림과 그런 웃음이 더 풍성하게 이 무덤 앞에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아, 그 때가 되면, 나는 나 자신을 비로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기억을 용서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손자녀석에게, 그 환한 미소에다, 미움을 전승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세계일보 현충일기념 특집칼럼에서
<한림대 특임교수,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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