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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의 주말드라마 ‘서울 1945’가 대한민국 건국 주역들을 헐뜯고 해방전후사를 좌편향 시각으로 왜곡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럴 경우 집필 작가는 픽션임을 내세우게 된다. 픽션이 작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요, 행복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따르는 식견이 전제돼야 하고,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안목의 표준이 있어야 한다.
일제 때 귀족 딸로 ‘황군 위문공연’을 다녔다는, 만들어진 인물이 이승만의 수양딸이 되어 돈암장을 드나들게 한 것에 대해 제작진은 시인 모윤숙도 이승만의 사랑을 받았다는 식으로 강변하고, 여운형 암살사건이나 정판사 위폐사건에 관해서는 ‘이 드라마는 당시의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인물들 간 멜로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식견이 모자란 탓이며, 사리를 판단하는 표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의 범주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 식견과 표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두른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된다.
KBS의 ‘서울 1945’는 이승만, 장택상 등 실제의 인물이 등장하고, 여운형 암살사건, 정판사 위폐사건과 같은 실제로 있었던 민감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스토리의 핵심은 창작된 인물에 의하여 진행된다.
이를테면 실제의 사건을 다루면서 창작된 인물을 등장시킨다면 해석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식견 없이 확대해석된 픽션의 너울이 변명하거나 때로는 보호받고자 하는 행위가 되어서는 작가도 떳떳지 못하고, 제작진도 취할 길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서도 민감한 부분을 거론하기 위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논거를 제시할 수가 있어야 한다. 또 새롭게 발견된 사료에 의해 이전까지의 해석을 뒤집어서 정립할 수 있다면 작가에게는 그보다 더 영광스러울 경우는 없다.
내가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을 쓰던 8년 동안 겪었던 가장 쓰리고 아픈 경험은 정보기관에 불려가 말도 되지 않는 협박에 시달린 것이 아니라, 여러 종친회로부터 당한 고발과 폭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는 “드라마의 내용과 같은 비열한 행동은 하질 않았다”고 강변하면서 내 연구실의 기물을 파손하는가 하면 때로는 법원에 고발하기도 했다. 그 고발과 폭력을 잠재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신뢰할 수 있는 논거(조선왕조실록)를 제시하여 그들 스스로 선조의 과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픽션이 작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라고 하더라도 그 픽션을 구사하는 룰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한 광범위한 식견과 그것을 취하고 버리는 표준이 없이 실제로 있었던 인물의 인격이나 행실에 훼손을 가하는 것은 픽션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가의 무지이거나 폭력일 수밖에 없다.-문화일보 6월13일자에서
<극작가·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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