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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영화나 역사 드라마에 있어 언제나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면서 논란되는 부분이 고증考證입니다. 그러나 역사소설을 놓고는 고증의 문제가 크게 논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소설이 문자로 표현되는 픽션이기 때문이며, 또 인간을 탐구한다는 구실로 분명치 않은 사실부분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도 작품을 이루는 데는 아무 하자가 없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실제의 형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까닭으로 고증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모두가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고증의 문제도 실제로는 풍속을 적은 개인의 수상집을 기준으로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음률에 능하여 외출 할 때면 늘 거문고를 등에 메고 다녔고, 조선시대 최초로 선글라스風眼鏡를 끼었던 멋쟁이 실학자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당시대의 살아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 가옥의 구조는 서울 외에는 대부분 초가草家가 10분의 8, 9쯤 된다. 침실은 모두 온돌이며 사방이 벽으로 되었고, 모두 들창과 문이 있다. 이는 중국의 구들 형태와는 같지 않으며, 다시 실외에는 나무판자로 마루를 놓았다.
홍대용의 <건정동필담> 상권
뿐만이 아닙니다. 홍대용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15>의 <북학의北學議>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기록도 풍속을 살피는데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고도 남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백 마리가 죽는다. 나라에서 거행하는 제사와 호궤犒饋때는 성균관이나 5부 안에까지도 24개소의 고깃간이 생기고, 3백여 주州의 관官에서도 반드시 고깃간을 벌였다. 혹 작은 고을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지 않는다. 그러나 큰 고을에서는 몇 마리씩 겹쳐 잡으니 결국은 날마다 잡는 셈이다.
또 서울과 외방에서 혼인잔치 때나 장사 때 잡는 것 등 법령을 어기면서 사사로이 잡는 것을 합치면 대충 계산하여도 벌써 그와 같다.
국가가 기록한 문건이 아닌데도 역사와 풍속을 살피는 데 필요불가결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의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문필가가 글을 적을 때 무엇에 유념해야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 역시 같은 책에 적은 박제가의 글입니다.
- 우리나라는 동서로 천리이고 남북으로는 동서의 3배나 된다.
서울은 그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의 오는 거리는 가로로는 5백 리에 불과하고 세로로는 1천리에 불과하다.
또 3면이 바다로 둘러있으므로 바다에 가까운 곳은 각기 배로 통행한다면 육지 위에서만 통상通商하는 자는 서울까지는 멀어도 5,6일에 불과한 것이고, 가까우면 2,3일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가에서 서쪽 끝까지 간다 해도 날짜가 곱이 걸릴 정도일 것이다. 유안劉晏이 걸음 잘 걷는 자를 각 처에 배치하듯 한다면 4방 모든 물가의 높고 낮은 것을 며칠 안에 고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메산골에서는 돌배를 담가서 신맛을 메주 대용으로 쓰는 자가 있으며, 또 새우젓이나 조개젓을 보고는 이상한 물건이라 하니 그 가난함이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단언하건데 그것은 수레가 없는 까닭이라고 할 수가 있다.
박제가 <북학의>
박제가의 <북학의>가 간행된 것은 1778(정조2년)입니다. 지금부터 230년 전 조선 땅에 ‘수레’가 없었던 까닭으로 물류物流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는 충격적인 기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종류의 글을 소개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만, 옛 날 기록이 오늘의 일과 같거나 또는 오늘을 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역사나 옛 문헌을 읽는 것은 가슴에 간직하기 위한 것이지 읽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풍속에 관한 기술이라 하여 꼭 개인의 수상에만 의존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사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가지 풍속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다만 상찬해야 할 일이거나 혹은 불미한 일에 연관되었을 때만 기술되는 한계가 있었기에 아주 다채롭지는 않습니다. 남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고 여자는 치마저고리에 장옷을 걸쳤다면 어김없는 사대부가의 남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만나서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고 있으면, 조선조와 같은 사회에서 어떻게 키스를 할 수 있느냐면서 고증을 들먹이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조선사회의 모든 풍속은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라는 획일적인 발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음은 <세종실록>에 적혀 있는 구절입니다.
召雙與端之常哮愛好,
不獨夜寢 畫亦交頸舐舌….
기록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원문을 적었습니다만, 그 뜻은 “소쌍과 단지가 서로 좋아하여 밤에 혼자 자는 일이 없었고, 낮에도 혀를 바꾸어 가며 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종 조면 자그마치 600여 년 전의 일입니다. 더구나 이 기록은 여성과 여성끼리의 동성연애를 두고 적은 글이며, 어느 야사류野史類도 아닌 <세종실록>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동성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들의 행위가 이러한데, 사랑하는 남녀가 키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중의 당연한 일이었다고 믿어집니다.
낡은 것을 읽어서 새 것으로 간직하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것은 역사인식을 날 세우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극작가,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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