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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치거나 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상태를 ‘염치廉恥’라고 합니다. 반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고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 남의 신세를 지고서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파렴치破廉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염치를 깨버린 사람들이란 뜻일 것입니다. 염치가 있으면 마음 안의 청렴함이 작용하여 수치스러움을 알게 하지만, 파렴치한 사람에게는 청렴함이 모자라는 탓으로 잘못을 범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관자管子의 <목민편>에 보면 나라를 버티게 하는 네 가지 덕목이 나옵니다.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일러 사유四維라고한 것이 바로 네 가지 덕목이라고 말하면서 그 네 가지가 하나라도 부족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절묘하게 설파하였습니다. ‘예의염치’ 이 네 가지 덕목 중에 하나가 없으면 나라가 기울게 되고, 둘이 없으며 위태롭게 되며, 셋이 없으면 뒤집어지고, 모두 없으면 그 나라는 파멸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지켜보노라면 네 가지 모두가 없어지지 않았나하는 두려움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사회 각 분야의 모든 사정이 양극화 현상으로 치닫고 있음을 반복하여 불 수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임명과정에서 일어난 일가운데서 정말로 보기 흉하고 딱했던 것은 남의 '구설口說'에 오른다는 그 '구설'의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논문을 두 번 계재한다던가, 연구비를 두 번 받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설'에 올랐다는 그 하나만으로 물러설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비로소 지식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구설'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논문을 돌리는 것이 대학가의 오랜 관행이라는 또 다른 '구설'이 생기는 거지요. 지금 어디다 대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까. 우리 대학이라는 곳이, 교수의 양식이 그런 정도라면 제 얼굴에 침뱉는 얘기인데,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부류가 교수라면 그 교수들이 바로 염치가 없기 때문이요, 그래서 나라가 망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 관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예의염치’에 다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네 가지 덕목을 더하여 팔덕八德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유’가 나를 떠받치는 데 필요한 덕목이라면 ‘팔덕’은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사유의 첫 번째 글자가 ‘예’입니다. ‘예’를 잦춘 사람에게 염치가 없을 까닭이 없고, ‘예’가 있는 집안이 화평한 것이 염치가 있기 때문이라면, ‘예’가 살아 있는 정부에는 염치가 있고, ‘예’가 살아있는 기업에 염치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요즘 우리 정치나 기업을 살펴보면 도무지 염치라고는 없습니다. 국회위원도 장관도 품위 없는 막말을 무슨 자랑처럼 내뱉고 있을 뿐,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눈 닦고 찾아도 없습니다. 이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데 국민들이 신망을 보내 줄 까닭이 없습니다.
- 집안에 예절이 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의 분별이 있고, 부녀자의 거처하는 곳에 예절이 있기 때문에 삼족三族이 화목하고, 조정에 예절이 있기 때문에 관직과 품계의 차례가 있고, 사냥에 예절이 있기 때문에 군사軍事의 법이서고, 군대에 예절이 있기 때문에 싸움의 공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 선현들은 이렇듯 금과옥조와 같은 말을 남겨놓으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염치를 가르치고 있지만, 요즘의 세태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염치’를 더 모르고 삽니다. 염치가 있고서야 비로소 의로움이 소중한 것을 알게 되는데도 지식인이라는 탈을 쓴 사람들까지 딴전을 피우면서 사는 판국이라 ‘염치’라는 말이 오히려 사치하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의로움을 잡고, 의롭지 않은 일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웬 일인지 사람들은 의롭지 않은 일에 나서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큰 이득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이득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손에 보물을 들었다는 자부심이 있다면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 따위가 눈에 들어올 까닭이 없는데도 누구라 할 것 없이 허상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 부유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과 소원하게 지내지 않은 것은 곧 인간으로서 대장부요, 부유하면 나아가고 가난하면 물러서면 곧 인간으로서 소인의 무리이다.
당대의 시인 소동파가 들려주는 말이지만, 이것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허상을 바라보며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말 할 때 흔히 고학력사회로 들어섰다고들 평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고등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일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파렴치 한 일들뿐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일에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학력이 낮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엄청난 모순이 엄존하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점차 우리는 거기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부정을 저지른 고위관직 자들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려들지 안습니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마치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언성을 높이는 파렴치도 흔하게 보게 됩니다. 그가 저지를 잘못을 어린 아이들까지 알고 있는데도 당사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파렴치로 일관할 때도 있습니다. 염치가 없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참담한 일들을 끊임없이 보면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을 고달프게 마련입니다. 염치를 갖추지 못한 것은 공부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몸에 익혀야 할 ‘예’와 ‘의’를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인용한 관자의 예언을 우리가 사는 사회에 적용하면 우리가 사는 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는 단계를 지나서 뒤집어지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음이 완연해 집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근본이 되어야 할 염치가 살아지면서 권력의 상층부가 파렴치해 졌기 때문이다.
- 문밖에 나가서는 배성을 큰 손님 보듯이 조심하고, 방에 들어오면 사람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예’를 갖추면 누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남이 나를 중하게 여기기를 바란다면 내가 남을 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치는 동서고금이 다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학문의 범주가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법도의 하나일 뿐이라면 지식인 사회부터 염치를 다시 찾아야 하지를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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