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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공론의 장, 복원 시급하다
유재천   |  2006-09-14 11:35:16  |  조회 2653 인쇄하기
무너진 공론의 장, 복원 시급하다

흔히 민주주의는 여론의 정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견을 알아보는 절차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같은 절차나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이며 필요한 조건은 공공의 관심사에 대해 활발한 의견이 교환되는 ‘공론의 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정책결정을 요구하는 중요한 현안에 대한 정확하고도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토론되는 가운데 합의에 이르는 ‘공론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용광로라 할 수 있다. 만약 용광로가 제 구실을 못하게 고장 난 경우 철은 생산될 수 없듯이 ‘공론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절차상 파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의 공론장은 얼마나 민주주의의 용광로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대답은 ‘아니다’이다. 공론장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왜 그럴까? 현대사회에서 주된 공론장 구실은 매스 미디어가 담당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미디어는 그런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향성 뒷받침할 자료 중점보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이 현안을 다루는 공론장이 정상적으로 형성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객관적이며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어야만 한다. 적어도 한·미간의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는 경우 영역별 이해득실이 어떤 것이며, 국내 산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해결할 방안은 무엇인지 등을 상세히 국민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러한 정보를 토대로 찬 · 반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배려하는 것이 미디어 공론장의 구실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미디어 마다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자신들이 설정한 지향성을 뒷받침해 줄만한 자료들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는가 하면 찬반 의견을 균형 있게 제시하려는 노력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책방향에 동조하는 의견 위주로 공론을 유도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자국의 경제가 파탄에 이른 남미 국가의 사례를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행태가 그 같은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디어가 공론장을 왜곡시키고 있는 경우는 이제 일상이 되고 말았다. 요즘 갈등마저 빚어내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디어가 각기 자기 입장을 지지하는 정보나 의견을 위주로 지면을 꾸리거나 방송하는 까닭에 공론장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면 미디어만 그럴까? 그렇지 않다. 정당이나 사회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중요한 공공의 현안이 있을 때 여론을 수렴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공청회나 토론회를 하는 경우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할 사람들에게 주제발표를 시키고 토론자로 제3자를 한두 명 끼워넣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이를 보도하는 미디어도 각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다루기는 물론이다. 말하자면 공청회나 토론회를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주의주장만 옹호하는 형국이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주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동의를 받는 일을 주관하는 국정홍보처도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영상홍보원이 운영하는 KTV의 경우 정부정책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에 반대의견을 가진 토론자는 참석시키지 말라는 국정홍보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정부정책에 대한 찬성의견만 개진되고 말게 된다. 그래서 홍보는 없고 ‘프로파간다’에 그치고 말아 국민을 설득하기는커녕 KTV를 외면하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파당적 공청회 다루지 말자
어쩌다 한국사회의 공론장이 이 지경으로 무너지게 되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빈부의 양극화보다 더 심각한 여론형성 메커니즘의 양극화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왜 심각할까? 예를 들어 경제의 양극화를 생각해 보자. 빈부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려면 먼저 공론장이 제 기능을 발휘해 여론의 뒷받침, 다시 말해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너진 공론장을 다시 복원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허상이 되고 말 것이며, 아무리 외쳐본들 사회 통합이 될 리 만무하다. 이제 공론장을 복원시키는 일은 먼저 미디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파적이고 파당적인 공청회와 토론회 기사는 절대 다루지 말자. 그 보다 미디어가 먼저 솔선수범할 일은 제발 숙고 저널리즘으로 나아가 달라는 것이다.

유재천 (한림대 한림과학원 특임교수)
- 내일신문 논설 200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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