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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살아나야하는 이유
서지문   |  2006-10-15 16:19:49  |  조회 2809 인쇄하기
삼성전자에서 새로 개발한 기적의 반도체 칩의 용량은 보통 도서관 하나에 있는 수백만권의 책을 다 담을 만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용량은 인간의 뇌 기억용량에 육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도한 뉴스캐스터가 말했듯이, 사람의 두뇌에 수백만권의 책 내용이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100년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고, 100년간 인지하고 사고하고 느끼고, 100년간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뇌의 용량이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광활한 뇌를 사람들은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 것일까? 돈벌이에 필요한 지식과 출세에 필요한 요령으로만 채워져 있는 뇌는 운동기구들로 가득 찬 살림집 거실만큼 살벌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화초도 있고 그림도 있고 편안한 의자도 있어야 심신의 휴식도 취할 수 있고 문제를 차분히 해결할 용기도, 한 차원 높은 도약을 위한 새로운 발상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뇌 속에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한 요령과 기술만 저장돼 있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나 자기 성찰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회는 마찰음과 파열음이 무성한 무자비한 경쟁의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인생의 목표가 다만 출세와 치부, 그리고 감각적 향락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이라든가 지혜는 군더더기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장애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출세하고 잘나가던 사람이 좌절하고 꺾였을 때 그에게 재기할 힘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순전히 ‘오기’로 다시 일어선다 하더라도 폐허가 된 그의 내면은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어떤 역사의 격랑에 시달리며 오늘에 도달했고, 인생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 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고, 인간의 도리에 대해 성인은 무엇을 말했는가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의 내면의 빈곤을 치유해 줄 복지정책은 없다. 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만난 인물들의 고뇌와 통한, 환희와 분노, 희망과 좌절, 공포와 용기, 그리고 자신과의 필사적 싸움, 이런 것들의 여운이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해주고 우리의 일그러진 심성을 어루만져서 펴 준다.

이런 내적 자산이 없는 사람은 좌절과 실패에 봉착했을 때 자기비하에 빠져 마약이나 사행성게임으로 자신의 의식을 마비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데 필요한 ‘지혜’의 원자재이다. 인문학이 ‘소용없는’ 학문이 되면서 세상에는 가치와 정도(正道), 양식과 공동선의 개념이 사라졌다. 또 사람이 사람에게 삶의 동반자, 함께 노력해서 같이 삶의 질을 높이고 힘을 합해서 의미 있는 업적을 성취할 대상이 아니고 이용하고 추월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양식과 품위는 위선과 가식으로 간주되고 몰상식이 범람하게 되었다. 교육부총리를 하겠다는 사람이 학술논문의 중복 게재는 정당한 관행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정치공세라고 노발대발하고, 헌법을 제대로 모르고 수호할 능력도 없는 헌재소장 지명자도 헌재의 권위를 희생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겠다는 식이다. 대통령은 각료 임명권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니까 자기가 어떤 넥타이를 매어도 트집을 잡으면 안 되는 것같이 각료도 누구를 앉히건 국민은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요즘은 대통령을 위시해 나라의 녹을 먹는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직책이 자기가 투쟁해서 따낸 것이므로 자기 마음대로 요리해도 된다고 생각할 뿐, 그 직책이 갖는 사회적 의미라든가 공적인 도의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것 같다.

인문학이 사멸한 사회의 종말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돈도, 지위도 치유해주지 못하는 내면의 빈곤을 치유하고, 존재의 초라함을 받아들이고 초라함을 극복하면서 얻은 지혜로 사회를 향상시키고 이웃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은 인문학의 토양뿐이다.

고려대교수·영문학

세계일보 9.24. [시론]

기사 원문 보기(클릭) ->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510&PCode=0007&DataID=200609241346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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