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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세상사는 일이 시끌벅적하기도 쉽지가 않다. 어느 분야를 살펴보아도 성한 곳이 없을 정도다. 그 원인을 찾기도 어렵지가 않다. 원한이 많은 사람들이 원한을 풀 수 있는 자리에 오르고, 그 원한을 풀어가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 때문이다. 무리가 따르는 곳에는 반드시 구설(口舌)이 있게 되지만, 구설이 곧 범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흔치가 않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원한과 구설이 뒤범벅이 되어 성한 사람들이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있을 때가 그러했다. 연산군은 다복하게 태어났으나, 어머님에 대한 원한에 사무치게 되면서 다스리는 자의 체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한을 갚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무리수를 두어야 하고, 그 무리수 때문에 구설이 그칠 날이 없었다.
연산군의 생애는 정말로 드라마틱하다. 성종의 첫 중전인 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딸)가 세상을 떠나자, 후궁이었던 숙의(淑儀) 윤 씨가 다른 후궁들의 시샘을 받으면서 새 중전으로 발탁되었다. 연산군은 성종과 그녀의 사이에서 왕실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중전 윤 씨는 자신의 생일날에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인수대비의 격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중전 윤 씨를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인수대비는 그녀의 폐서인(廢庶人)을 강행하게 되었고, 성종은 어머님의 엄명을 뿌리치지 못했다. 폐서인이 되어 사가로 쫓겨 나왔지만, 폐비 윤 씨는 인수대비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다. 그리고 얼마 후, 폐비 윤 씨는 소복(素服)을 벗고 화장을 하였다는 조금은 과장된 모함을 받으면서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것을 빌미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다. 이때가 성종 12년(1481)이었고, 연산군은 6세였다.
성종과 인수대비는 대소신료들에게는 물론 상궁들에게까지 폐비 윤씨의 비극을 입에 담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어린 연산군이 그 사연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소년이 된 연산군은 매사에 지나치게 엄격한 할머니(인수대비)의 훈도를 받으면서 성장하지만, 사모(思母)의 정은 날로 더해가기만 한다.
마침내 연산군은 1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어 조선왕조 열 번째 임금으로 보위를 이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해인 1494년(연산군 1년)에 부왕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읽으면서 친어머님인 폐비 윤 씨가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가 폭발된다. 자식이 어머님을 기리는 것도 죄가 되느냐는 반발이었다.
연산군은 <성종실록>을 살펴서라도 어머님의 사사(賜死)를 주청한 자를 가려낼 것을 명했고, 폐비 윤씨의 사사 당일 사약을 가지고 갔던 신하들까지 찾아내어 가차 없이 처단한다. 그것이 바로 부왕의 고명을 따르지 않는 불충임을 입에 담는 내시들까지도 참혹하게 베어 넘기면서 또 다른 ‘구설’에 휘말리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에게 밀려드는 구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험담을 입에 담는다는 구실로 내시들을 더욱 더 핍박한다. 구설은 날로 더해질 수밖에 없다.
연산군은 내시들에게 성한 관리들보다 더한 세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명문대가에서 내시에게 다투어 딸을 주었다는 사실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내시가 고자와 같이 성행위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귀애하는 딸을 그들에게 출가하게 하는 것은 딸을 팔아서 치부를 하거나 출세 길을 터보겠다는 탐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연산군은 내시들을 같은 자라에 불러모아놓고 바지를 내리게 하고 그들의 성기(男根)를 조사한다. 놀랍게도 멀쩡한 사내가 내시가 되어 있었음을 발견한다. 더구나 내시들의 아내가 명문대가의 딸이라는 사실이 연산군을 소름끼치게 하였다.
연산군은 이들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혁신을 단행하기로 다짐한다. 마침내 재위 10년(1504) 5월 14일, 의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린다.
-내시들이 외간 사람들과 상통하니 궁중의 일이 혹시라도 누설될 것인데, 더구나 인아(姻婭 : 양쪽 사돈가 동서간의 통칭)와 관계가 되는 자임에랴.
지금 내관들이 많이 조정 관원들의 친족들에게 장가를 들어 아내로 삼으니 그 사이에 어찌 인연으로 왕래하여 궁궐 안의 일을 전파함이 없겠는가. 내시의 처족(妻族)되는 조정관원은 외방으로 내보내어 서울에서 살지 못하게 하되, 내관이 죽은 다음에야 서울로 돌아 올 수 있음을 중외에 효유하라.
이 같은 전지에 따라 엄중히 조사를 하였더니 내시를 사위로 맞은 사람은 첨지사 조한손 등 32명으로 나타났고, 또 정효창(鄭孝昌)이라는 내시는 왕후의 친족에게 장가를 들었음이 밝혀지자, 곤장 1백대를 때려서 귀양을 보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시의 임무가 무엇인가. 임금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을 옹위하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보들…, 특히 대신들의 동향을 보고하여 왕권을 보전하는데 힘을 보태는 일이다. 그럼에도 내시들의 입에서 임금의 은밀하고도 부도덕한 행적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처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시를 함부로 다스리면 구설이 따르게 마련이다.
연산군의 분노는 모든 기득권세력에게 철퇴를 내리면서 내시들에게는 입조심 하라는 신언패(愼言牌)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게 하였다. 그 ‘신언패’에 새겨진 구절이 기가 막히다.
口是禍之門(입은 화를 불러들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세치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내시들은 그런 ‘신언패’를 목에 걸고 다니면서도 연산군의 부도덕함을 입에 담았다. ‘입은 화를 불러드리는 문이요, 세치 혓바닥이 몸을 베는 칼’이라는 사실이 내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연산군 자신에게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은 처자식과 함께 강화도 교동 섬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두 달 후에 역질을 앓으면서 세상을 떠난다. 춘추 31세의 짧은 생애였지만…, 구설이 곧 범죄라는 사실을 후대에게 알려 주고서도 어진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은 그를 에워싸고 있었던 또 다른 구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초당 신봉승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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