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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한스 디트마이어 독일 연방은행 총재는 세계경제연구원과 무역협회 공동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기억나는 점은 그가 독일 경제의 실패를 한국이 답습하는 우를 결코 범하지 말라던 우정 어린 충고였다. 그는 콜 전 총리가 부임한 이후 대중영합적인 경제정책을 썼다고 비판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올리고 복지혜택을 증대하는 분배정책을 강행함으로써 당시 세계 최고로 꼽히고 있던 독일의 경제성장 동력을 소멸시켰다는 것이다. 그 후 정권을 이양받은 ‘슈뢰더’ 총리는 이른바 ‘어젠다 2010’을 발표한다.
분배복지 위주의 정책에서 성장위주 정책으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앞선 정권이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뿌리내린 구정책의 잡근을 뽑아 새 뿌리로 갈아 심기에는 시간적·물리적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독일 경제는 최근까지도 연 1%대의 저성장에 머물러 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졌던 경제 일등국가였지만 정책 방향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저성장국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더욱이 막대한 비용 부담이 생기는 동·서독 통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독일뿐 아니라 선진 유럽 각국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쓰라린 실패의 교훈이다.
지금 유럽 각국은 지나친 복지 위주 분배정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벌이고 있지만 뒤틀려진 경제 환경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새로 EU에 가입한 국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또 최근 연세대에서 초청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나라의 큰 정부 지향 정책, 이에 따른 막대한 중과세에 의한 분배복지 정책을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꼬집은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책은 신중해야 한다. 한 정권이 경도된 이념에 기초하든, 실물경제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됐든 한번 채택된 정책은 비록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정책을 수행하더라도 그 기조를 단시일 내에 바꿀 수 없다. 그 결과 막대한 후유증과 장기적인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고 성장의 발목을 잡게 된다. 유럽제국의 불행한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왜 지금 우리는 이를 비판이나 점검 없이 그대로 답습하려 하는가?
앨빈 토플러는 최근 발간된 저서 『부의 미래』에서 “빈부 격차 해소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빈곤층의 생활 수준을 올리지 않더라도 부유층을 가난하게 끌어내리면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빈부 격차를 극적으로 확대시켰지만 동시에 절대빈곤을 축소시켰다.
모든 계층의 사람을 평등하게 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외없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 최근 역사의 교훈이다. 따라서 제1의 목표는 생활에 대한 의식수준을 높여 절대적 빈곤에서 탈출코자 스스로 노력하는데 둬야지 빈부 격차가 확대되느냐에 대한 논란은 아예 무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얼마 전 미국의 스탠퍼드대에서 나온 논문 내용 중 일부다. “제2의 물결인 공업화 시대를 맞아 농업경제 시대의 대명사이던 절대 빈곤층은 많이 해소됐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 논의는 일부 유럽국가에서 지난 40년 동안 계속 이뤄져 왔지만 실패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실패한 정책은 최근 세계적으로 비약하고 있는 중국 같은 사회주의국가나 인도에서조차 채택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오직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만 시대착오적으로 채택이 강행되고 있다. 그 결과는 경제성장 잠재력에 큰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의 한 나라는 한국이다.
시대착오적 빈부격차 논의
토플러는 가속·불규칙화·연속적 활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상호 관련된 변화에 의해 시간, 나아가 부라는 개념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종전에 애용되었던 물건은 물론 아이디어, 비즈니스 모델 등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조차 참혹하게 버려지는 이 급변하는 시대에, 그리고 공간의 제약이 허물어지고 지식만이 살아남게 되는 이 마당에, 어떻게 오늘의 빈부 격차가 유지된다고 믿고 이를 필사적으로 시정하려고 발버둥치는 가운데 입안된 정책이 유효할 수 있겠는가?”
그는 부와 빈의 개념조차 모호해지고 부의 몰락도 용이하며 소위 생산소비자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고 한다. 생산소비자란 경제통계에 안 잡히고 따라서 고식적 부의 개념에서도 무시되어온 무급의 사회봉사자(Volunteer) 또는 무보수의 과학애호가, IT 등 정보제공자, 가사종사자 등을 의미한다.
이런 성향이 강한 소위 빈곤층의 비가시적 경제활동이 부의 개념으로 정식화되어야 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즉시 가시적 부로 전환되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리엄 이스터리 뉴욕대 교수는 “아직도 지식경제의 기술혁신과 활력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갖는 경제 전문가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혁신에 의해 산업 전체, 교역조건, 비교우위가 단기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평가하지 않거나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고도 부연하고 있다. 또 “지금 당장은 겨우 먹고 살기에 급급한 극빈생활자들이 세계적 정보경제에 일단 편입되면 생산성에 어떠한 혁명적 영향이 발생하는지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빈부 격차 해소, 즉 복지 분배의 문제는 이미 경제학의 사소한 분야로만 다루어져 가는 경향에 있다. 또 성장위주냐 분배위주냐 논쟁을 일으키는 빈부의 개념조차 전혀 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일의 선진적 경제에서는 개인의 지식에 바탕을 둔 창의에 초점이 모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간의 동시화와 비동시화 간 긴박한 차질과 대처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다.
부의 기초적 조건의 가장 깊은 부분인 시간과의 관계 자체에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다시 말해 부의 개념이 달라져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복지의 향상이나 부의 균등분배를 지향하는 정책은 공업화시대의 고루한 사고방식을 방기하지 못하거나 다분히 오늘(또는 과거)의 부유층과 빈곤층을 편가르기 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사고가 득세하고 있는 것이다.
분배는 특정정부가 손댈 일 아니다
지식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지식은 어느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부의 형태가 되고 있다. 변화의 속도, 국경 없는 공간, 무진장의 지식이 지배하는 오늘과 이러한 추세가 가속화하는 내일은 이미 어제라는 과거와 판이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월리엄 노크는 그의 유명한 저서 『괴상한 새 세상(Bold New World)』에서 21세기를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의 발달, 정보사회 또는 국경이 소멸된 사회(Borderless Society), 부정착의 사회(Placeless Society), 모든 것이 어느 곳에나 있는 시대(Age of Everything-Everywhere)로 일컬어지는 ‘제 4차원 세계’로 표현하고 있다.
분배정의나 부의 편재로 인한 분배정책은 이미 특정 국가, 특정 정부가 손 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깝고(near) 먼(far) 개념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됐듯이 빈부와 분배의 불평등은 각자의 편협한 마음에 있을 뿐 보편적 현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정부는 날이 갈수록 점차 주체하기 힘들어질 큰 정부를 애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있다. 결과적으로 더 큰 정부를 배태할 분배 위주 복지정책을 근간으로 한 ‘비전 2030’을 강행하려 한다. 하지만 회의가 든다. 비단 1600조원이라는 거액의 소요 예산 조달방법과 이에 따른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뿐만이 아니다.
10년 앞, 아니 5년 앞의 운명을 가늠하기 힘드는 이 격변의 시기에 25년 앞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실현성이 극히 모호한 정책을 수립·시행하는 데 대한 의문과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낭비, 그리고 역작용을 낳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전문화 교육을 강화해 국민의 근로 의욕을 높이고 일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하며, 사기업이 활성화되도록 도와주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있다. 니트족이나 후리터족의 의식주 해결을 위한 복지 분배정책은 자칫 발암의 병소로 전락할 위험까지 있다. 홍세표 객원기자
-2006.09. 이코노미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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