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재현되는가. 북한 핵 사태를 둘러싼 움직임이 나치 히틀러의 불장난 과정을 상기시켜서 하는 말이다. 히틀러와 김정일은 다같이 나치즘과 주체철학과 같은 사이비 체제론을 바탕으로 하여 군사력 강화를 통한 ‘강성대국’을 지향했다. 양자는 모두 대외적으로 무시무시한 공갈과 협박을 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금야금 전술’을 구사, 소기의 목표를 차례차례 기정사실화 했다. 양자는 대내적으로 무자비한 탄압을 하는 한편 정예 친위세력의 양성에 주력하여 병영국가를 완성했다.
양자는 모두 자국의 난국(難局)을 외국 탓으로 돌려 특정 외세에 대한 증오심을 국민에게 한껏 부추겼다. 히틀러는 자국의 열악한 상황을 승전국의 탐욕 탓으로 돌렸다. 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원죄에 대한 속죄의식은 눈곱 만큼도 없었다. 김정일은 북한의 고난은 온전히 미국 탓이라고 국민을 세뇌시키고 있다. 6·25 남침에 대한 일말의 사죄의식은 물론이고 그 후의 갖가지 대남 타격에 대해선 일고의 가책도 표시하지 않은 채 오로지 미국 때문에 북한이 압살당할 지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다.
히틀러와 김정일은 그 밑바탕에 국민의 정서적 민족주의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지상주의자였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저지른 후과로 톡톡한 대가를 치르느라 피폐해진 독일 국민의 상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6백여만이나 살인했고, 오스트리아를 쉽게 합병할 수 있었다. 김정일은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남쪽에서 북한의 책임문제 거론을 사실상 무장해제 시키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와 김정일은 국제정세의 복잡하고 미묘함을 역이용하여 적대진영을 이간·분열시킨 천재성을 발휘했다. 히틀러는 세계전략에 대한 영·불간의 이해(利害) 다툼 및 전쟁에 대한 불안·공포심를 교활하게 활용하여 영·불의 유화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외교사에 유화정책의 표본으로 기록되어 있는 1938년 9월의 뮌헨 회담이 그것이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데 이어 3백80만명의 독일인들이 거주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의 독일 할양을 요구했다. 영·불 정상은 독일의 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갖고 독일이 더 이상 영토할양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감언에 속아 주데텐란트의 독일할양에 합의했다. 영·불 등 강대국들이 히틀러에 ‘햇볕정책’을 쪼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총리 체임벌린은 런던에 귀환한 후 뮌헨회담을 ‘평화의 보장’이라고 자랑했다. 그 자랑은 반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히틀러는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으로 석권해 버렸다. 히틀러는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지 11일 후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대전의 서막이었다. 영·불 정상의 섣부른 낙관과, 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유약한 겁쟁이 심리가 바로 전대미문의 세계전쟁을 촉발했던 것이다.
김정일은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 균형을 최대한 향유하면서 협박과 공갈, 그리고 회유를 일삼고 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인질로 삼았듯이 김정일은 남쪽을 볼모로 삼고 있다. 특히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의 달콤함, 노벨평화상이라는 개인의 명예욕, 사회주의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본격적인 햇볕정책을 추구했다고 분석된다. 북한이 핵개발을 은밀히 하고 있는 동안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온 김대중은 체임벌린처럼 전쟁은 없다고 단언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북핵 사태가 진전될 때마다 북한을 감싸기에 전력을 다했다. 북한을 변호·옹호하면서 미국에 대해 북한과 대화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김정일이 한·미 정부를 이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정일은 변함없이 하나의 레퍼토리 ‘미국 탓’을 되뇌어 남쪽의 ‘김정일 친위세력’을 고무시켰다.
히틀러가 ‘이것 하나 주면’ 하는 식으로 오스트리아합병·주데텐란트할양성공·체코슬로바키아점령을 차례로 성사시켰듯 김정일도 핵실험을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는 남쪽 당국으로부터는 ‘자위상’, ‘미국 탓’이라는 동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남쪽 정부가 김정일에 사실상 아부하는 사이 김정일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핵무기를 손에 넣었다. 어설픈 유화론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유인했듯이 설익은 햇볕정책이 김정일의 핵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5년만에 수백만의 자국민을 전사시킨 후 자살했고, 독일은 두 동강이 났다. 체임벌린도 바로 실각한 후 1940년 사망하여 멍청한 정치인의 표본으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정일이 핵실험의 성공으로 득의한 순간 자기 체제의 붕괴를 앞당기고 있다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김정일의 우산 노릇을 충실히 해왔던 중국이 마침내 채찍을 들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우군 세력을 자처한 남쪽 정권과 동조세력의 운명도 수명을 다하고 있다. 히틀러도 사방을 적으로 만들어 망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고립무원의 김정일이 얼마나 더 버틸지가 관심일 뿐이라는 추론은 자연스럽다. 북한인민이 아닌 김정일을 두둔했던 남쪽의 몇몇 지도자도 대한민국의 체임벌린이라는 역사의 조롱거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