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언젠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렇게 저렇게 죽음을 겪었습니다. 나 자신이 죽어본 것은 아니지만 숫한 죽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의 죽음’도 불가피하다는 것을 일찍이 예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고 전제해도 좋을 듯합니다. 사실 우리는 죽음의 필연성을 알고 있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면 죽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죽음은 오히려 ‘생명의 현상’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해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누구나 아는 일,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 이미 충분히 보고 듣고 견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지극한 일상입니다. 언제 어디에나 있는 일입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데, 삶의 자리에 죽음이 없으면 그것은 아예 삶의 자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처럼 죽음이 편만(遍滿)해 있는데,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흔히 겪는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들의 일상적인 화제(話題)가 됩니다. 맥락에 따라 제약을 받는 일이 당연히 없을 수 없지만 우리의 화제가 되지 못할 일들은 실은 없습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가히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은 여느 일처럼 그런 색깔이나 음조(音調)나 모양새로 이야기 되지 않습니다. 우울하고 음습하고 괴기스럽고 섬뜩한 배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금기로 잔뜩 울이 처져 있습니다. 금기로 말한다면 비슷한 경우로 성(性)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몹시 꺼리는 이야기 거리이긴 해도 마침내 그 금기가 깨지고 봇물이 터지면 ‘환희’와 연결되고 생명의 탄생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담론은 누구에게나 내키지 않는 일, 가볍게 다가가고 싶지 않은 그러한 일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죽음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모든 죽음담론이 그리 힘든 것은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염두에 두고 예를 들어보십시다. 살아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죽음이해는 죽음담론을 무척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를테면 죽음에 대한 생리적인 설명이 그러합니다. 비록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부터 죽음인지를 판별하기가 곤혹스럽게 된 것이 오늘 우리의 죽음현상이기도 합니다만 의학적인 설명보다 투명하고 명확하게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실증적인 현상과 연계하여 죽음은 진단되고 선언됩니다. 질병으로부터 노쇠에 이르는 온갖 까닭들이 동원되면서 죽음은 누구나 거절할 수 없는 자명한 현상으로 서술됩니다. 의학에서의 죽음, 생리적인 죽음은 이야기하기가 소박하게 쉽습니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 이외에도 죽음을 이야기하기가 어렵지 않은 경우를 또 하나 들 수 있습니다. 사회현상으로 환원된 죽음을 기술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인구학적인 맥락에서 이른바 사망률이라든지 평균수명이라든지 죽음의 원인별 분류통계라든지 하는데서 등장하는 죽음현상은 조금도 어렵지 않게 이야기 됩니다. 생리적인 죽음담론보다 훨씬 쉽습니다. 가끔 도로변에서 볼 수 있는 교통사고표지판에 등장하는 사망자 숫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일은 죽음담론 중에서도 가장 쉬운 일입니다.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망 ~명’이라고 할 때에 등장하는 숫자만으로 충분하게 설명됩니다. 사망자는 생존자의 대칭개념이면서 양화(量化)되고 물화(物化)된 숫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서에 조그만 자극조차 받지 않고 ‘~명’의 죽음을 예사롭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담론은 쉽습니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야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음담론이 그것 자체로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무척 자유롭고 쉬운 화제입니다. 그러나 특정한 경우에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해도 좋다고 할 만큼 힘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특정한 경우를 ‘죽음과의 거리’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나와 죽음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우리는 죽음이 무언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서술할 수 있습니다. 먼 거리에서 보면 죽음은 거의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는 ‘사물’처럼 투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리에 있는 죽음담론은 쉬울 뿐만 아니라 도대체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거리가 점점 좁혀지면, 나와 죽음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죽음에 대한 담론을 쉽게 펼 수가 없습니다. 내 친구의 죽음은 이미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리적인 현상만으로 설명하고 끝내는 것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일’이 됩니다. 부모의 죽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아내나 남편의 죽음은 더할 수 없이 바짝 다가온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직면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제까지의 죽음이해는 그 상황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절박하게 경험합니다. 그러다 자식의 죽음에 이르면 우리는 스스로 그 죽음에 대한 인식주체이기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자리에 섭니다. 죽음은 아무런 거리도 남겨놓지 않고 나와 거의 일치한 자리에 이르러 있습니다. 죽음담론은 나도 모르는 침묵을 강요당합니다. 이에 이르면 아예 우리는 죽음에 대한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합니다. ‘기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죽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남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아무리 지근(至近)한 자리의 죽음이라할지라도 아직은 나와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가피하게 ‘나의 죽음’과 만납니다. 물론 나의 죽음조차 우리는 ‘아직’ 거리를 두고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경우 대체로 우리는 ‘내 죽음’이라할지라도 다른 물화된 죽음과 만나듯이 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투명성을 가지고 그것을 기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조만간 우리는 내가 내 죽음과 그대로 일치하는 죽음자리에 이릅니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 이러한 자리에서 내 죽음을 스스로 승인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정확하게, 나는 죽음에 대한 어떤 담론도 펼치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나의 죽음과의 직면은 죽음에 대한 이제까지의 나의 앎을 송두리째 무화(無化)시키든가 기능불능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죽음담론이 쉽지 않은 것은 바로 이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비록 그것이 양화되고 물화된 죽음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자신의 죽음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는 짐작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저어합니다. 두려워하고 피하고 화내고 달아나려 하지만 실은 자기죽음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태도를 낳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의 죽음’에 대한 담론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는 의식 속에서 ‘나의 죽음’자체를 회피하려하고,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애써 간과하려합니다. 죽음에 대한 온갖 우중충한 묘사나 금기의 설정은 죽음자체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나의 죽음’과의 직면에서 야기된 ‘문화’라고 해야 더 옳을 듯합니다.
2.
그렇다고 해서 ‘나의 죽음’담론이 불가능 하냐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가능하다고 해서 비로소 그러한 죽음 이야기를 하게 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인간은 아무리 피하고 싶고 간과하고 싶지만 ‘나의 죽음’을 이야기 해야만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죽음에 대한 무수하고 다양한 금기의 설정, 죽음을 저어하고 피하고자 하는 거의 본능적인 방어, ‘나의 죽음’과 직면하는 기막힌 절망으로 인한 ‘압도된 침묵’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많은 죽음담론을 ‘생산’했고, 이를 전승하고 있습니다.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 그런데 그래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그것이 죽음담론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죽음을 증언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죽음을 주제로 하여 펼쳐져야한다 할지라도 그 담론은 사물에 관한 인식과 다른 한계를 갖습니다. ‘남의 죽음’은 기술될 수 있지만 ‘나의 죽음’은 적어도 나에 의해서 기술될 수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이른바 ‘임사기록(臨死記錄)’들이 많이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기록이 아닙니다. ‘거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기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죽음을 증언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묘사하는 나의 죽음을 내가 수용하거나 승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 때는 이미 내가 ‘고인(故人)’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했을 때의 죽음담론은 결국 ‘인식의 언어’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무엇이라든지, 죽음의 의미는 어떤 것이라든지, 죽음을 어떻게 죽는 것이 죽음다운 죽음이라든지 하는 내용들은 전혀 ‘인식’이 초래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감성이나 의지로, 또는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죽음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느낌에 의해서 확인되기도 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연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한 어떤 의지가 나의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쩌면 산문적이기 보다 시적(詩的)이어서 더 죽음담론에 어울리는 범주일 수도 있습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나의 죽음’에 대한 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껏 부풀려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주목해서 우리 자신들의 ‘나의 죽음’ 담론을 살펴보면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과 부닥칩니다. 죽음현상자체에 대한 분석적 이해를 한 것도 아닌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또 구체적으로 학습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많이 겪었지만 나의 것은 아니었던 죽음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껏 그려보며 상상한 것도 아닌데, 내 속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진술이 솟아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조건도 막상 기술하려면 전혀 뚜렷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고 발언할 때와 다르지 않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 담론은 ‘고백’의 언어로 발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 발언한 것들을 다듬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의 언어에 실리는 죽음담론은 쉽게 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죽음담론은 ‘나의 죽음’을 그 담론 안에 담아야 비로소 ‘현실적’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진술은 인식이나 여타 마음결의 언어에 실려 펼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죽음이 고백의 언어에 실리면 그것은 죽음주체가 자기 죽음을 발언하는 것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없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펼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든지, 아무래도 ‘나의 죽음’에 대한 진술을 어떤 형태로든 드러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든지, 다시 말하면, 죽음담론이 ‘나의 죽음’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계기에 직면한 것이 현실이라고 느끼게 되면 우리는 ‘죽음이란 ~다’가 아니라 ‘나는 죽음을 이렇게 맞는다, 지닌다. 산다, 또는 죽는다’라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백은 그 내용이 객체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객체와 일치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백은 객체와의 관계보다 객체와 만나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진실한 발언이 고백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 상대방은 내 고백을 경멸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고백은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한 발언입니다. 고백의 주체는 자기 발언의 실제적인 효용을 측정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했는가를 측정합니다. 고백의 준거는 나 자신의 나에 대한 정직성입니다.
이와 아울러 우리는 고백에 대하여 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고백은 미성숙한 인격이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식은 성숙과 상관없이 가능합니다. 사물에 대한 앎은 인간적인 성숙과 엄밀한 의미에서 무관합니다. 감성이나 상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백은 다릅니다. 그것은 인식이나 감성적 공감이나 의지적 실천이나 상상적 실재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넘어 현실과 실재, 꿈과 이상을 자기 안에 다 안고, 그러한 자신에게 마지막 성실성을 가지고 정직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궁극적인 봉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것에 헌신하고자 하는 처음 몸짓이 곧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고백’을 그렇게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죽음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듯 그렇게 죽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성숙과 그 성숙함에 근거한 정직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때 비로소, 또는 마침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그 때 이야기될 수 있는 죽음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인류의 역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겨놓은 ‘지혜’의 전승이란 또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구현하는 것이 일컬어 ‘종교’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면서 예외 없이 죽음이 삶의 종말이라는 귀결에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원론적인 갈등이 구체화된 교의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 둘 사이의 단절을 전제하면서 아예 죽음을 ‘저주’라고 단정한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무한한 재생의 연쇄를 이야기하면서 죽음을 아예 평가절하 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역의 합일의 논리 속에 담아 그 둘은 둘이되 하나라는, 또는 죽음은 삶이고 삶은 죽음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죽음은 실제로 끝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다른 실재의 처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묻는다든지 죽음담론을 편다든지 하는 것은 자칫 비현실적인 허황한 언어유희 속에서 삶을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는 염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서조차 죽음은 언어에 담기지는 않았어도 몸짓 속에서는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제의(祭儀)가 그것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든,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들’이든, 아니면 더 나아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불리든, 인간의 삶 속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죽음으로 응집되면서 구체화되었고, 그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면서 그 문제를 풀어 삶을 삶답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문화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하는 물음을 그 대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물음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삶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에 이르고,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에 이른다는 이 주장은 역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신비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마음 놓고 죽음담론을 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죽음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장수와 건강으로 표상화 되는 죽음 거부의 몸짓이 일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죽음은 기계적인 조작개념의 울안에 들어간 지 오래입니다. 양화되고 물화된 죽음인식은 죽음을 온전한 끝으로, 종국으로, 소멸로,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음’으로 여기게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수단화 된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죽어버린다’든지 ‘죽여 버린다’든지 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관성에 젖어있습니다. 주검은 어서 치워야할 쓰레기가 된지 오래입니다. 역사 속에 아련히 숨쉬어오는 조금은 엽기적이지만 ‘시신숭배’가 지녔던 본래적인 주검에 대한 경외의 태도는 장례를 위한 기능적인 숙련성 안에서 무산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례 문화 안에는 이미 곡소리도 침묵한지 오래입니다. 아이들은 혈연의 주검에도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슬픔도 아픔도 찢어지는 별리의 탄식도 없습니다. 더 이상 삶이 짐이 되기를 그쳐주었다는 다행함과 죽음을 통한 사회적 자아의 자기 확인 의례가 상업주의와 더불어 판을 치는 황량함만이 그 의례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미 충분히 ‘값이 싸졌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거룩해서라는 이유에서 죽음에 금기가 드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불결하다는 이유에서 죽음에 온갖 위생적인 금기가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재수 없는 일’이고 아파트에 4층을 명기하는 것은 무식한 처사입니다. 장묘제도를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꾸자는 ‘운동’은 충실한 경제논리로만 그 정당성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죽음은 끝이고, 망자는 이제 살아있지 않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상실하면 그것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남은 유일한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을 청결의 원리로 처리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도리입니다.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죽음문화도 불가피하게 변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죽음문화도 그러한 변화 속에서 그 나름의 새로운 준거를 좇아 잘 정착하고 있다고 보면 그 뿐입니다. 옛날을 준거로 사라진 의례와 잊혀진 의미론을 애써 되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솟습니다. 죽음문화의 상실 또는 부재는 생명문화의 상실이나 부재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주검이 쓰레기로 치워지는 정황에서는 삶도 또한 쓰레기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검이 값싸지는 ‘시장'에서는 삶도 그렇게 값이 싸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신비를 잃으면 삶도 그렇게 메마르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못하면 삶 앞에서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경제논리로만 관리되면 생명도 그렇게 됩니다. 아니, 이미 생명이 그렇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죽음이 그렇게 다루어진다고 해도 좋습니다. 문제는 죽음과 삶이 단절되어 있는 두 개의 다른 사물이나 사태나 현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죽음’을 직면하는 절박한 자세로 죽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에게 성숙한 정직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러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삶을 따듯하게 살고자 했다면 죽음도 또한 따듯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발언해야 합니다. 삶을 바르게 살고자 했다면 죽음도 바르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진술해야 합니다.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랐다면 죽음도 부끄럼 없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삶을 완성하고 싶었다면,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도 완성하고 싶은 소원을 지녀야 하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온갖 마음짓 몸짓을 경주해야 합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고 싶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다면 죽음으로부터도 달아나지 말아야 하며, 삶을 간과하면서 살아갈 수 없듯이 죽음도 간과하며 살 수 없음을 이야기해야 하고, 환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환한 죽음을 안을 수 있어야 하며, 마침내 삶을 사랑한다면 죽음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삶 안에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죽음과 삶은 둘이 아닙니다. 죽음은 내게 다가오는 밖의 실재가 아닌 듯합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면서 죽음을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내 죽음의 계기는 내게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출산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지 삶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이 ‘문화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이 스스로 자존(自尊)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세상’에서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홍, 한림대 과학원 교수, 종교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