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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의 종전선언 제의를 주목한다
김영희   |  2006-12-26 01:33:58  |  조회 2834 인쇄하기
만물유전(萬物流轉)은 길게 보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짧게 보아도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던 것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불변이 가변(可變)이 되면서 국제관계에서는 막혔던 교착상태가 풀리고 죽기 살기로 싸우던 전쟁이 끝나고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김정일에 대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놀라운 태도 변화도 그런 경우의 하나다.

부시에게 김정일은 악의 축(2002)이었고, 피그미(2005)였고, 폭군(2005)이었다. 2002년 여름 부시를 인터뷰한 워싱턴 포스트 대기자 밥 우드워드의 책 '부시의 전쟁'에 부시가 김정일을 인간적으로 얼마나 혐오했는가가 잘 묘사돼 있다. "김정일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감정이 격해진 대통령이 자리에서 점프라도 하는 줄 알았다. 부시는 손가락을 휘두르면서 나는 김정일이 딱 질색(I loathe Kim Jongil!)이라고 소리쳤다." 부시는 김정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면서 아마도 부시 자신의 기독교 신앙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고문하고 대량으로 굶겨 죽이는 김정일은 부시에게 대화하고 협상할 상대가 아니라 멀리하고 파괴할 대상이었다.

그런 부시가 지난달 노무현 대통령과의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할 경우 노무현과 부시와 김정일이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에 함께 서명을 하자고 제의했다. 김정일은 마침내 부시의 대화 상대로 인정받았다. 엄청난 사건이다. 물론 남북한과 미국 정상들이 한국전쟁을 공식으로 종결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하자는 데 합의를 해도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거치고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하거나 적어도 폐기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평화협정 체결의 절차도 합의를 봐야 한다. 중국의 참가 여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종전선언과 핵 폐기의 선후 문제는 더욱더 까다롭다.

그러나 종전선언은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인 외피가 돼줄 것이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끝내는 평화협상이 구체적인 세부 문제에 걸려 진전이 없을 때 헨리 키신저가 생각해낸 것이 개념적 타결(conceptual breakthrough)이었다. 전쟁을 끝낸다는 큰 합의를 먼저 함으로써 신뢰를 구축하고 세부 문제를 논의하는 방식이었다. 남북한과 미국이 외교적 지혜를 총동원하면 부시의 종전선언은 북핵뿐 아니라 북한 문제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상의 개념적 타결이 될 것이다. 종전선언은 북한의 핵 포기와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을 전제로 하는 고차원의 정치선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부시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핵을 버리면 북한이 도달할 수 있는 종착역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부시가 김정일을 제거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한 6자회담 아무리 해도 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부시 정부의 네오콘(신보수파)들은 부시의 김정일 혐오를 이용해 미국의 대북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부시와 네오콘의 틈에서 거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공화당의 참패로 끝난 미국의 11월 중간선거 결과가 이런 사정을 일거에 뒤집었다. 북한의 정권교체에 관심이 많았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이라크전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유엔에서 대북 강경제재를 주도한 존 볼턴 대사도 사임한다.

전문가들은 공화당의 선거 패배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부시의 김정일관과 북한관의 변화는 정책기조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형식논리를 버리고 미국과의 공조로 김정일이 부시의 종전선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올인해야 한다. 부시의 과감한 제의는 김정일이 "통 큰 결단"으로 화답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김정일은 대북제재의 고통이 북한 지도부의 골수에 미치기 전에 부시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은 큰 행운임을 알라.-중앙일보 12월8일자에서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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