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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녀석은 저와 제법 대화가 됩니다.
정진홍   |  2007-01-30 06:36:24  |  조회 2418 인쇄하기
세배

손자 녀석은 저와 제법 대화가 됩니다. 우선 그 녀석은 제가 무슨 말을 할 때면 제 눈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참 마음에 듭니다. 뿐만 아니라 제 말끝에 반드시 ‘왜’라고 묻습니다. 이 또한 이야기하는 저를 매우 힘 솟게 하는 추임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왜’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면 조금은 지치기도 합니다만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추임새가 꽤 제 장단을 맞추어주는 듯싶습니다.
며칠 전에 세밑도 되고 곧 새해도 맞게 되겠기에 이야기 주제를 ‘세배’로 잡았습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새해가 오거든! 새해 첫날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어른들께 절을 해야 해. 그것을 세배라고 하는 거야. 또 돌아가신 옛 어른들께 차례도 지내고.”
“왜?”
“한 해가 다 가고 새해가 오니까 모든 것이 새것이거든! 그러니까 어른들께도 새 인사를 드리는 거야.”
“알았어. 세배할께!”
“그런데 세배에는 새해세배도 있지만 묵은세배도 있단다. 한해를 보내면서 그믐날에 어른들께 한해 잘 지냈다고 절을 하는 거야.”
“묵은 게 뭐야?”
“오래 되었다는 거야.”
“오래 되었는데 왜 절을 해? 새것에다 하지?”
“새것만 좋은 것이 아니란다. 오래 된 것도 좋은 거야. 어쩌면 더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왜?”
“이를테면 너도 새 장난감도 좋지만 오래 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좋은 때가 있지 않니?”
“없어! 그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보다 새 것이 더 좋아!”
“하지만 생각해봐라. 블록 놀이를 안했다면 변신 로봇을 지금처럼 잘 가지고 놀 수 있었겠니? 그러니까 이제는 낡았지만 전에 놀던 오래된 장난감은 참 고마운 거야.”
“왜?”
“지난 것은 지금을 있게 한 거니까!”
“.........그래도 난 새게 좋더라!”
“그래, 나도 알아. 새것이 헌것보다 더 좋아. 틀림없어. 하지만 새것은 헌 것이 있어 생긴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새것은 없어. 새것이어도 곧 헌 것이 되고, 그 헌 것 끝에 새것이 맺히는 거야. 그러니까 새것의 처음은 헌 것이지.....”
“그래도 새것이 좋아!”
“그럼 네 오래 된 장난감 다 버려도 괜찮아?”
“아니, 그럼 안 돼!”
“그것 봐. 너도 헌 것 좋아하잖아!”
“왜?”
“왜라니? 지난 것이라고 해서 이제 버려버리자고 한다든지, 망각 속에 흘려버리자고 한다든지, 다 소용이 없다고 한다든지, 지루해졌다고 한다든지, 허무하다고 한다든지, 회한에 사무친다고 한다든지, 그러면서 새것이 좋다고 텀벙 새것에만 빠져들면 그것은 좋지 않은 거지! 안 그래?”
“...........”
“할아버지도 새 것이 좋아! 하지만 새 것과 만날 때면 우선 지난 것에 대한 예의를 갖출 줄 알아야 돼! 지난 것에 대한 감사, 끝난 세월에 대한 사랑, 아니면 사라진 것들에 대한 외경의 염을 품을 수 있어야지..... 그래야 비로소 새것이 새것으로 자기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야. 끝에 대한 예의, 지난 것에 대한 존경 없이 새것을 맞으면 그 새것은 새것일 수가 없어.......”
“할아버지! 졸리다. 자자”
“그래. 나도 졸리다. 그런데 뿌리 없는 나무는 곧 시들고 만다는 것 아니?”
“나도 알아, 할아버지!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니까”
“그래 맞아. 그러니까 묵은세배가 빠진 새해세배는 실은 뿌리 없는 세배인 거야”
“...............”

손자 녀석은 어느새 잠에 빠졌나봅니다.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저는 그 녀석이 묵은세배를 하는 꿈을 꾸기를 바랐습니다. 아무튼 저는 손자 녀석하고 꽤 잘 되는 대화를 하며 삽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녀석 나이가 몇 살이냐고요? 이제 만 여섯 살입니다.

*(한림대 과학원 특임교수, 종교학)
- <연금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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