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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면서 가끔은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가 있다.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세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단연 성군 세종이라고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러나 세계의 사람들은 고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조차도 성군 세종을 입에 담으면 겨우 ‘한글’을 만들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일이 이런 지경이 된 데는 역사학자보다 사회학을 정공했거나,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성군 세종의 행적을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혹은 철학적인 안목으로 우리에게는 물론 세계인에게 부각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핀잔을 놓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수물 두 살 젊은 나이에 아버님 태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다.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고 천성이 어질다고 하더라도 수물 두 살이면 어린 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종은 태종이라는 거목 아래서 어려운 시대를 이끌어갈 위엄과 지혜를 배웠고, 그 아버지로부터 완벽한 검증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한 나라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있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린나이가 분명하다.
더구나 세종이 거느려야 했던 정승과 판서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기라성이나 다름이 없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박은, 대제학 유관, 예조판서 변계량, 병조판서 조말생 등을 비롯하여 김종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당대의 석학들을 다스리고 거느려야 한다. 이 다스림과 거느림에는 식견識見과 표준標準이 필수요건이다.
세종의 식견은 한 권의 책을 1만 번씩 읽어낸 독서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의 표준은 이른바 “하늘의 가르침을 외면하지 않았고, 책 속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배우고 익힌 바는 반드시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조선주자학朝鮮朱子學의 근본을 실천한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세종의 완벽한 지도력은 “행동을 수반한 지식인’의 귀감龜鑑에서 시작되었다. 또 그것은 재위기간 32년 동안 단 한 번도 변치 않았기에 신료들은 그에게 신망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리더십이라고 일컬어지는 지도력은 ‘위엄’과 ‘신망’을 갖춤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다할 수가 있다. 세종대왕의 식견과 표준에 의한 실천력이야 말로 지도력의 표본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불운하게도 무려 7년 동안을 혹독한 가뭄에 시달린다. 이때의 일은 역사는 ‘세종 7년 대한大旱’이라고 적는다. 백성들의 운명이 오직 농사에 달려 있던 시절, 요즘과 같이 수리와 관개의 시설마저 넉넉하지 못했던 처지에 내리 7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면 백성들의 살길이 막연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종은 육조관아의 큰 길(지금의 광화문 거리)에 가마솥을 내가 걸게 하고 도성 백성들에게 죽을 끓여서 먹이게 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진휼賑恤임이 분명하다.
세종은 배고파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지켜보다가 경복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경회루 근처에 이른 세종은 따르는 신료들에게 시름에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한다.
이때의 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임금이 경회루 동쪽에 버려둔 재목으로 별실 두 칸을 짓게 하였는데,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모초茅草로 덮게 하였으니 장식은 모두 친히 명령하여 힘써 검소하게 하였다. 임금은 이때에 와서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이 별실別室에서 기거하였다.
백성들의 고초와 아픔을 몸소 체험으로 감당하려는 청년 세종의 지행知行함이 여기에 이르자 신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승과 판서들은 연일 세종이 기거하는 초가마당에 꿇어앉아 침전으로 들 것을 진언하였고, 왕비 소헌왕후 또한 눈물로 호소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백성들이 끼니를 이어가지 못하는 데, 어찌 내가 호화로운 침전에 누어 편한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요즘의 정치인들이 이런 귀감을 알고나 있는지 자못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정치 환경이 날로 폐단의 질곡으로만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배우지 싫으면 흉내라도 좀 내주었으면 하는 심정일 뿐이다.
-초당 신봉승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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