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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 경찰은 납치ㆍ강간 혐의로 당시 21세의 멕시코계 미국인 에네스토 미란다를 체포했다. 처음에는 무죄를 주장하다가 신문 과정이 길어지자 범행 일체를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서자 자백자술서를 증거로 인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주 법정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최저 20년, 최고 30년의 무거운 형을 내렸다.
미국인권연맹(ACLU) 소속 존 프린 변호사가 이 사건을 상고심까지 끌고갔다. 1966년 연방대법원은 5대4의 표결로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요지는 진술거부권, 변호인선임권 등 피의자의 권리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미란다 원칙`을 확립한 판결이다. 이를 계기로 영화나 TV 수사극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장면, 미란다 카드를 읽는 경찰 모습이 등장하게 됐다. 미란다는 석방됐으나, 10년 뒤 어느 술집 싸움판에서 칼에 찔려 허무한 일생을 마쳤다. 당시 대법원장은 얼 워런(1891~1974)이었다.
캔자스 주 토피카 시 교육청을 상대로 한 `브라운 사건`이 또 하나의 유명한 사건이다. 1950년대 초 미국에는 흑백분리 교육이 지배적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학생 린다 브라운은 피부색을 이유로 지척에 있는 백인학교를 못 다니고 멀리 있는 흑인학교에 통학해야 했다. 이 사건은 하급심에서 패소했으나, 전국유색인권익향상협회(NAACP)의 도움을 받으며 연방대법원에 올라갔다. `워런 법정`은 1954년 만장일치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미국 전역에 인종별 학교분리가 금지되게 됐다. 물론 인종분리자 등 일부 세력들의 비판이 뒤따랐다.
워런은 누구인가. 철도회사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방학 중에 철도노무자와 함께 일하며 사회경험을 넓히면서 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 검사직을 거쳐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세 번 당선됐다. 주지사이던 그가 선거유세 중 인연이 있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1890~1969)에 의해 1953년 대법원장에 임명된 이래 1969년 퇴임까지 장장 15년8개월간 재직하면서, 앞을 바라보는 선견지명과 주위를 살피는 균형감각으로 당시 인권문제, 인종문제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나라를 하나로 어우르는 선도적 판결이 내려지도록 리더십을 발휘했다. `워런 법정` 이후 미국 국민들은 법원에 대한 신뢰가 한층 깊어졌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다툼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규범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모든 규범을 다 법으로 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도덕, 관습 등이 있다. 실정법은 최소한의 규범일 뿐이다. 법의 그물이 지나치게 얼기설기 촘촘하면 법이 잘 지켜지지도 않고 사회 발전이 정체된다. 넓은 의미의 법은 국회만 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정부의 명령도 법에 준한다. 사법부도 판결을 통해 판례를 만들어내면 이것도 법적 효과를 가진다.
요즘 헌법재판소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수도이전 반대 결정 후 `입법권 침해` `사법부 쿠데타` `인사청문회` 등 여당 의원들의 원색적 비판이 인민재판을 방불케 한다. 여야의 평가가 지난번 대통령 탄핵 결정 때와는 판이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인가. 이러고도 법치국가인가. 군사독재시대에도 사법부를 어려워했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행정부나 입법부의 독재를 경계하는 사려 깊은 마음에서 삼권분립을 주장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는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비민주적 작태가 가관이다. 사법부 권위를 훼손하는 광기 어린 언동이 중단돼야 민주국가로서의 기강이 바로 선다. 요즘 경제가 풀릴 조짐이 없다. 왜냐? 법질서를 집권세력 스스로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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