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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교는 특정 종교가 자기를 확장하고 전승하려는 일련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선교는 ‘영토 확장’이나 ‘고객유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종교의 영향력의 확대, 세의 불림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주장’이나 ‘신념’이 이러한 행위양태를 지닌다는 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당연한 일입니다.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주장은 이미 주장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는 신념도 이미 신념일 수 있기에는 너무 초라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확산하고 전달하여 공감하는 사람을 많게 하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선교행위는 종교의 당위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보하거나 피하거나 소극적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종교의 선교행위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사물의 생존원리를 비난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현존하는 사물은 그렇게 자기를 확장하고 지속하면서 자신을 유지합니다. 선교는 생존의 원리입니다.
종교사를 보면 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종교사는 수많은 종교가 역사 속에서 등장했다가 사라진 흔적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정한 종교를 영원하다고 묘사한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주장’일 수는 있어도 역사적 현상을 일컫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사라진 종교, 곧 현존하지 않는 종교의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특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종교에 속한 신도가 ‘지금 여기’에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신은 이름으로라도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을 살아있게 하는 신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약하는 논리지만 이 현상을 우리는 ‘선교가 실패하여 신도가 없어지면 신도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선교는 그것 자체가 종교를 종교이게 하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라고 다시 강조할 수 있습니다.
2.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의 울밖에 있는 사람들도 대체로 종교의 선교행위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비록 종교가 아니더라도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그러한 자기주장의 불가피성을 삶의 현실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선교행위는 때로 격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의 ‘삶의 양태(life style)’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앎과 특정한 행위양식과 공유하고 참여하는 공동체와 거기에서 형성되고 전승되는 규범을 지닌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총체적인 변화’를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결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삶의 양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문화권의 단절이라든지 시대의 확연한 구분이라든지 하는 것이 불가능한 채 그 모든 것이 혼재하는 다원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없을 수 없고, 일반화할 수 있는 가치나 의미체계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특정한 삶의 양태를 강요당할 수는 없다는 ‘자유’는 충분히 확보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종교가 내게 자기 종교를 요청하거나 강요할 경우, 그것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불편하게하며, 곤혹스럽게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삶의 양태에 대한 간섭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현실적으로 상당한 긴장을 수반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의 울밖에 있는 사람들의 선교에 대한 비판이 일게 됩니다. ‘자기를 지우려는 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옳음과 그름을 전제한 접근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의도 나에 대한 부정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독선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돈독한 신앙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선교행태는 대체로 악을 전제한 구원의 당위를 설파합니다. 선교 대상의 자리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가 참혹하게 부정당하고 폄하되는 계기가 됩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악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 이러한 반응을 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교에 대한 저항의 가장 원초적인 것은 이러한 경우입니다.
반드시 악으로 정죄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든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다든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든지 하는 이른바 친절한 충고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지는 현상입니다. 그러한 조언은 대체로 논의를 초래하기보다 수용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선교자는 피선교자를 교정하고 완성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고마운 일이지만 피선교자의 입장에서는 때로 그것은 자아를 폄하하는 비수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모든 문제의 해답은 내게 있다’고 하는 태도를 통해 오히려 경박한 자기도취의 모습마저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선교는 유치한 자기탐닉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누구나 문화사를 읽고 있습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무지하지 않습니다. 모두 교양인은 아니라할지라도 적어도 상식의 수준에서 우리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지식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제각기 자기의 역사-문화 안에서 자신의 가치나 의미체계를 귀하게 여기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신념체계들이 가르침으로, 의례로, 공동체 규범으로 산재해 있는지 잘 압니다. 세상에는 결코 종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종교들이 자신의 ‘힘’을 확장하기 위하여 얼마나 ‘반종교적’인 행태를 드러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살육은 종교사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종교사는 또 다른 측면에서 정리한다면 그대로 종교 간의 싸움의 역사이고 종교 안에서조차 한 번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갈등의 역사입니다. 평화와 위로와 그로부터 비롯한 행복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종교 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역사 속의 종교뿐만 아니라 그러한 ‘싸움’의 현실이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전쟁’의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영토를 뺏기 위한 전쟁을 거처 이념을 확산하기 위한 전쟁에 이르렀고, 경제권을 확장하려는 보이지 않는 갈등들이 첨예해지는 오늘인데 막상 실제 전쟁은 온통 ‘종교적인 원인(遠因)’과 종교적인 정당화의 논리로 다듬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때로 종교의 선교활동이 인류의 삶 속에 있는 영원히 불식될 수 없는 갈등과 투쟁과 살생의 원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의식하기조차 합니다. 종교가 자신을 스스로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때부터 종교는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조차 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여전히 종교 울밖에 있는 사람들도 종교는 ‘좋은 것’이라는 인식,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나 겪는 삶 자체의 곤혹스러움이 그러한 기대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종교는 역사-문화를 통해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많은 사례를 남겨놓았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례는 ‘주장’이나 ‘신념’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것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전면에 부상하거나 그것이 선도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가 ‘주장의 확산’이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한 감동의 실천’인 경우, 그것은 ‘좋고,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종교의 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종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또는 종교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한결같이 좋은 주장과 좋은 가르침을 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나는 못해도 종교인들은 하는’ 실천입니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과정에서 직면하는 고뇌와 갈등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실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강요가 아니라 고백이어야 하고 설명이 아니라 증언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위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천’으로 구체화합니다. 종교 밖에서 기대하는 선교의 모습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배운 바를 그대로 행하려 하고, 감동을 현실적으로 자기 삶 속에서 구체화하며, 그것이 따듯한 온기처럼 퍼져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종교의 울 밖에서 기대하는 종교인들의 삶입니다. 온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고뇌가 가득 담긴 몸부림이어도 좋습니다. 자신의 감동과 자신의 터득에 정직하려는 것이 전달된다면 그러한 삶이 그대로 선교이고, 그 선교는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귀하고 참된 것으로 전달됩니다. 그렇게 되면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그 삶을 본받고 싶은 충동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소박한 비종교인의 심정입니다.
조직의 불가피성을 모르지 않습니다. 제도의 유지가 현실적으로 개인을 우선하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입니다. 그러나 조직을 위한 선교는 선교가 아닙니다. 이를 의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신조차, 이웃조차, 사랑이라는 덕목조차 조직이나 제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베푸는 사랑의 대상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일이 내가 속한 제도나 내가 신앙하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면 나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비신자는 신자의 그러한 태도를 직감으로 압니다. 물론 궁극적인 신앙의 대상에 대한 흠모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에 대한 감사가 옆에 있는 이웃에 대한 감사를 간과한 것일 때 빠지는 ‘비인간적인 돈독한 신앙’에 대한 경멸이 비종교인들에게서 일게 된다는 사실을 종교인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종교인들을 이상하게 꼬인 사람들이라고 질책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겪은 일입니다. 그 나라는 선교의 자유와 신교(信敎)의 자유가 구분되어 있어 믿는 자유는 기본권으로 인정하지만 선교의 자유는 실정법으로 제한을 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골을 지나다 작은 교회를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을 만나 어떻게 전도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말로 못하니까 실천으로 하죠.” 그 교회가 있는 행정구역 안에는 다른 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생적인 교회가 불과 3.4년 안에 7.8군데가 넘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주신 의무여서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과 감동을 증언하는 일이 선교의 내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신에게, 그리고 자기가 속한 종교공동체에 영광이 되는 그러한 선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러한 선교가 매우 드뭅니다. 오늘의 선교는 선악을 심판하는 진노하는 작은 신들이 무수한 소박한 영혼들을 겁주는 ‘영성의 착취’현상이지는 않은지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권력지향적 정치이념을 감춘 경우도 없지 않고 보면 불안합니다. 종교는 선교 때문에 지탱하지만 선교 때문에 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이 성공적인 선교를 하고 있다는 판단이 일고 있습니다. 가톨릭을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 대조되는 개신교에게는 쓰디쓴 충고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이 일이 우리 종교계 전체가 새로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하나의 ‘문화적’인 사건으로 다듬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공연히 울 밖에서 결례되는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한림대 과학원 특임교수. 종교학
- 월간 <사목> 200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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